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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다 Aug 07. 2023

회식하는 남편에게 한 복수

내 나름 통쾌했다.

아기를 키우는 18개월 동안 진정한 자유를 얻어 해방을 만끽하며 시간을 보낸 게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 보니 온전히 나만 생각한 시간은 0시간, 1박 2일 그 흔한 여행 한 번 가보지 못한 게 갑자기 억울해지는 오늘이다.


나도 회식하고 싶다, 친구들이랑 외식하고 싶다.

응, 난 지금 호르몬의 노예 되시겠다.


아기를 재우려고 같이 침대에 누워서 이야기하고 놀다 보면 내가 먼저 잠들기 일쑤다. 번쩍 눈을 떠보면 엄마 옆에서 살 부대끼며 새근새근 아기가 자고 있는데 아 재우는 데 성공했다 와 동시에 그냥 나도 쭉 잤더라면 싶다. 어찌 됐든 오늘도 육퇴 나이스다.


지친 몸을 이끌고 일어나 못다 한 집안일을 하려 시간을 확인하는 찰나 신랑에게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선배님들은 집에 가셨고, 또래끼리 2차하러 왔어요’


발 디딜 틈 없는 장난감밭, 토하기 일보 직전인 싱크대, 화장실에까지 남겨놓은 아기의 흔적들 할 게 산더미였고 자다 일어난 정신이 반만 돌아와 있던 나는 메시지에 아주 또렷한 정신상태가 되었다.


짜증수치가 갑자기 치솟았기 때문.


신랑이 회식을 한 덕분에 나는 저녁식사 준비를 안 하게 되었는데 그만큼 여유로운 시간이 생겼다. 그래서 회식 소식에 나이스라고 외친 것도 사실인데 나는 아기에게 치여(?) 지내는 동안 회식도 모자라 2차까지 간다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분노를 다스리는 데는 설거지만 한 것이 없으리라. 더러운 걸 닦으며 내 안 좋은 기분들도 함께 닦고 깨끗한 물로 씻어내며 나 또한 그런 기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는 것인데 다 끝내고 나면 기분은 상쾌함 그 자체가 된다.


근데 오늘은 이게 또 잘 안 먹히는 날이다. 이런 날은 신랑이 옆으로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빡치는 그런 날이기 때문에 나를 잘 다스려야 하..기는 무슨 빡치면 빡치는 거지.


혼자 짜증을 설거지로 삭히면서 입을 삐쭉 내밀고 꿍시렁거리던 그때 식탁 한편에 사다둔 빵이 보였다. 오늘 아기가 저녁식사를 하면서 느닷없이 빠아앙!!!! 을 울부짖기에 부리나케 주문했던 건데 신랑이 좋아하는 소시지빵도 하나 담았었다.


살짝의 분노를 담아 포장비닐을 뜯었다. 이 와중에 대각선으로 찢긴 비닐을 보며 너마저도 날 안 돕냐고 그냥 벗겨 던져버렸다. 그리곤 그 짜디짠 소시지빵을 크으으으으으게 한 입 물었다. 그리고 설거지를 이어갔다.


‘메롱이다, 소시지빵이 있는 걸 보면 좋아하겠지?라는 생각으로 같이 샀지만 이 존재조차도 모르게 내가 다 먹어버릴 테야. 밖에서 더 맛있는 걸 먹고 올 텐데 뭘. 근데 이거 진짜 맛있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겠어!’



정말 와구와구 씹어먹고 던진 비닐봉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혼자 통쾌했다. 이와 동시에 설거지도 마무리되었다. 회식 간 자여 소시지빵을 누리지 못할 지어다.


대단한 나만의 복수를 끝내고 기분 좋게 읽고 있던 책을 폈는데 진짜 볼 품 없는 내 행동이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저런 소소한 걸로 기분이 나아지는 게 웃기기도 하고, 귀가하며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 온 신랑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아이스크림 보다 소시지빵이 더 맛있었으니까 내가 이긴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도 제정신은 아니구나 싶었다.


신랑은 취해 잠들었다. 나는 책을 읽다가 아까 그 소시지빵 맛을 다시 떠올려 봤다. 다음엔 다른 소시지빵으로 준비해야지 맛있었지만 넌 너무 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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