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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Jun 08. 2021

오늘 마신 커피 한 잔에 당신의 얼굴을 띄웠습니다

서필훈 <커피를 좋아하면 생기는 일>을 읽고

<커피를 좋아하면 생기는 일>의 작가인 서필훈 커피리브레 대표는 안암동 보헤미안에서의 커피 한 잔으로  지난한 커피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했다. 같은 장소에서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의 나는 진한 커피를 마실 줄 몰라 미간을 찌푸리며 뜨거운 물을 들이붓는 애기 입맛의 대학원생이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몇 달 후 커피를 주력으로 하는 공정무역 단체에 입사하게 된다. 


철이 없었죠, 커피맛도 모르면서 커피업에 뛰어든다는 게

빈곤을 심화시키는 무역을 빈곤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삼겠다는 조직의 거창한 슬로건을 내 사명처럼 간직하고, 책에서 배운 빈곤과 불평등에 대한 지식들로 무장한 나의 업무는 영세한 커피 생산국의 농부들이 좋은 품질의 커피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고, 협동조합으로부터 커피를 구매하는 일이었다. 얼마만큼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그때그때 해야만 하는 일들을 했다. 커피 맛을 볼 줄 알아야 한다기에 회사에서 열 종류가 넘게 맛보며 연습하고도 퇴근 후 또 다른 커피를 맛보러 다닌 적도 있고, 생두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기에 커피 포대를 하루 종일 뒤져가며 다양한 결점이 있는 생두 샘플을 만들어 공부하기도 했다. 아로마 키트라는 희한한 교육자료를 통해 후각도 훈련을 통해 발달시킬 수 있다는 걸 배웠고, 지금도 써먹는 핸드드립 스킬은 그때 아침저녁으로 매일 커피를 내리며 익힌 것이다. 마실 줄도 모르는 커피로 '좋은 일'을 하겠다고 뛰어든 무지렁이 같은 나는 그 일을 하는 내내 업계 최고 수준의 전문가분들이 선의로 주시는 가르침과 도움을 여러 번 받았고, 몇 년 지났을 무렵에는 어깨너머로 주워들은 지식이 제법 쌓여 있었다. 서필훈 대표도 그때 만났던 전문가들 중 한 분이었다. 


내 커피잔 위에 언제나 떠오르는 얼굴들 

인생에서 가장 많은 애정을 커피에 쏟았던 그때 얻은 것이 지식과 기술들 뿐이었다면 나는 지금에 와서 커피를 즐기는 사람쯤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커피의 맛을 알게 됨과 동시에 생산지에서 커피를 키우는 사람들을 만났던 나는, 결과적으로 커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커피를 사랑한다. 그러나 이 사랑이 커피의 맛과 향미, 로스팅과 추출 등에 대한 지식에서 비롯하지 않았음도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이 사랑은 내가 만난 커피 생산자들의 얼굴, 커피나무에 든 벌레 때문에 애쓰는 부지런한 손, 발효가 너무 많이 된 커피를 팔지 못할까 걱정하는 이마의 굵은 주름, 멀리서 찾아온 손님에게 귀한 설탕 우유밥을 무한 리필해 주는 인심과, 경계 없는 아이들의 천진함 앞에서 피어났다. 거기서 우리가 함께 울고 웃었던 이야기들과, 그때 느꼈던 고마움, 기쁨, 안타까움, 미안함과 같은 감정들이 양분이 되어 오랜 시간 지나자 사랑이 되었다. 그 사랑의 증거는 지금도 내 커피잔 위에 떠오르는 생산자들의 얼굴이다. 커피와 관련된 일을 떠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그렇다 해도 내 경험이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기에 내가 살면서 마신 커피는 생산지 경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꼭 내가 방문했던 생산지에만 국한되지도 않는다. 에티오피아든, 과테말라든, 인도네시아든 커피는 어디서나 생산자의 노력과 사랑으로 자라고, 커피를 판 돈은 그들 자녀의 미래가 되고, 마을의 희망이 될 테니까. 그 연결고리를 직접 확인한 바 있는 나는 오늘도 커피잔을 앞에 두고 질문해 보면 된다. 내가 마신 커피는 어디서 왔는지, 누가 어떻게 생산했고 정당한 대가를 받았는지, 생산자의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제 때 밥을 먹고 행복한지. 내가 마시는 커피가 그들에게 어떤 가치와 미래를 가져다주는지. 


오늘도 내게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내어 준 모든 얼굴들에게 

<커피를 좋아하면 생기는 일>을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수많은 밑줄을 그었다. 그중에서도 좋아한다는 건 노력과 책임이 필요한 일이라는 말이 마음에 깊이 박혔다. 맛있는 커피 한 잔만으로도 쉽게 행복해지는 사람들이, 그런 행복을 하루에도 몇 번씩 취하면서 책임만 애써 피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죄책감을 주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세상을 구하라고 하는 건 물론 아니다. 다만 이 책에서 소개하는 많은 생산자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조금의 울림이라도 준다면, 내가 마신 커피를 만들어준 생산자의 얼굴을 잔 위에 한 번 띄워보는 건 어떨까. 기후변화와 싸우는 커피 생산자를 생각하며 환경을 위해 뭔가 실천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르완다와 콩고 민주공화국의 평화와 희망을 위해 기도할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 온두라스 차기테라는 아름을 보면서 산꼭대기 농장에서 손 흔드는 농민들을 떠올리고, 볼리비아 로스 로드리게즈의 페드로 파블로를, 인도 아라쿠 소녀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를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매일 마시는 커피는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얼굴을 기억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내가 일상처럼 사 먹는 커피도 내가 아는 사람이 정성껏 내어 준 커피로 바꾸어 주는 것. 생산자를 직접 만나고 커피를 사랑하게 된 나의 사연은 아주 드문 행운이었지만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아주 설레는 일 아닌가. 하지만 심장이 너무 두근댄다면 주의해야 한다. 설렘이라기보다는 카페인 반응일 가능성이 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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