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매일단어

즉흥성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공백을 내가 채우는 기분

by 담쟁이


“이따 만날래?” 아니면 “지금 나올래?”가 가장 익숙한 나에게, 며칠 후에 만나자고 약속을 잡고 날짜를 세는 건 꽤 무겁고 지루한 일이다.


만남의 목적이나 대상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시간을 어떻게 채워갈지 생각하는 건 오래 고민할수록 완벽해지기보다는 어려워졌고, 그게 가끔씩은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아주 조직적이고 준비성이 철저할수록 약속 날 직전의 시간은 마치 앞풀이를 며칠 동안이나 하는 느낌이었다. 과도히 신경 쓸 상대방이 눈에 선하니까 정말 그렇게 하고 싶지 않고, 나는 상관없는 일에 정성을 다할 상대방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그런 걸 정말 신경 안 쓴다는 사실 자체도 생각해보면 미안하고. 이런저런 호기심과 질문거리까지 뭉쳐져 생각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그 큰 덩어리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커지면 그냥 눈을 감아버리고 ‘다 귀찮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 이유로 약속을 파투 낸 적은 없지만.


항상 모든 것을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는 유형의 사람들은 아마 영영 모를 것이다. 상대방이 날 위해 일부러 시간을 비워놓는 것보다는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공백을 내가 채우는 기분이 더 좋다는 걸. 조금은 덜 준비된 모습과 아무도 책임감을 갖지 않는 일정으로 가볍게 만나고 헤어져 돌아가는 길에는 늘 서로 기분이 좋아서 ‘오늘 만나길 잘했다’며 서로를 칭찬하곤 했다.


정성껏 준비한 만남은 정말 고맙다. 하지만 즉흥적인 만남은 항상 기대 이상이다. 늘 융통성과 위기 대처능력이라고 포장하는 나의 즉흥성은 갈수록 심해지는지 살면서 점점 ‘내가 불쑥 연락했을 때 잠시 잠깐이라도 얼굴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더 편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편한 사람이 점점 더 좋아지는 건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뒷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