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정성껏 듣는 사람 앞에서 나는 감히 내 속도를 주장할 자신이 없다
만나면 언제나 속도감 있게 대화하게 되는 친구가 있다. 상호작용이니 그 속도를 누가 주도한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 친구만 만나면 나도 유독 말도 빨라지고 티키타카도 쉴 새 없이 오가고 누구랄 것도 없이 자주 빵 터지기도 한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촉하는 듯한 리액션을 하는 건 그 친구 특유의 말습관이었다. 이를테면 문장의 서술어가 채 끝나기 전에 '~했어? ~했어?‘라고 다음 내용을 어림짐작해서, 그러나 대부분 내가 말하려는 내용과 다른 방향으로 질문한다든가, 내가 시작한 문장의 끝을 본인이 대신 맺는다든지 하는 식이다. 아이러닉 하게도 그러한 재촉은 과속방지턱처럼 내 말문을 막히게 하는 경우가 더 잦았지만 번번이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내 속도와 의지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면 우리의 대화는 늘 생동감 넘치게 이어졌다. 중간중간 크게 깔깔대기도 가끔은 꽤 진중하기도 했고,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만 늘 반갑고 즐거운 대화를 하기에 좋은 상대라 생각했다.
몇 달 전 그의 오랜 말습관이 그날따라 유독 신경 쓰여 평소와 달리 하던 말을 멈추고 눈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왜 말을 끝까지 안 들어?”
잠시동안의 정적이 흐른 후 그는 미안하다고 했고, 우리는 바로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아무 일도 없는 듯 그날 하루는 지나갔지만, 나는 그 순간이 마음에 남았다. 몇 년 간 알고 지냈고 그 습관도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는데, 그날은 대체 뭐가 달랐을까 며칠간 되짚느라 생각은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날 줄 몰랐다.
그날 내가 하고 있던 이야기는 요새 가족 문제로 정말 괴로워하는 다른 친구 M의 삶이었다. 바로 전날 만났던 M의 이야기에 마음이 크게 쓰이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에 압도되어 있었던 나는, M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는 애꿎은 친구에게 ‘너 같으면 어떻겠냐’며 묻지도 않은 말을 쏟아냈던가보다. 우리가 나누는 그 어떤 주제보다 진지하고, 그 어느 때보다 들어주었으면 했던 순간에 나는 비로소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 친구는 내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구나.’
사실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대수롭잖게 여겼던 ‘경청하지 않는 시그널’이 갑자기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보통 이 친구와의 대화에서 경청을 기대하지 않았고 그건 우리 사이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는데, 내가 그날 갑자기 기대 수준을 높이니까 늘 똑같이 행동하던 친구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웠을 수 있다.
내 나름의 분석 이후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마다 잠깐씩 티 안 나게 나와 상대방의 상호작용을 관찰한다. 유독 대화가 편안하고 느리게 흘러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과의 대화는 가끔 정지 버튼을 누른 듯 둘 다 아무 말이 없이 없는 순간을 포함하기도 한다. 똑같은 내가 참여하는 대화인데 이토록 극명하게 속도가 달라지는 건 내가 잘 맞춰주는 사람이어서가 아닐 것이다. 내 말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심지어 내가 말하는 내용에 큰 관심이 없을 때라도 끝까지 정성껏 듣는 사람 앞에서 나는 감히 내 속도를 주장할 자신이 없다.
경청의 기본은 상대방의 말이 끝나고 나서 내 말을 시작하는 것이고, 맞장구는 말하는 흐름을 끊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네 말을 잘 듣고 있어’라는 신호는 적극적인 리액션으로만 줄 수 있는 게 아니며 침묵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면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의미를 간과할 수도 있다.
생각의 초점은 다른 데로 옮겨갔다. 우리가 이어온 이 ‘경청하지 않는 관계’가 이어질 수 있을까? 대화는 둘이 하는 거니까 둘 중 책임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결국 먼저 깨달은 내가 나서서 풀어야 하겠지. 선택이 내 몫임을 알겠다. 우리는 경청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경청하지 않는 사이도 있음을 인정하며 이대로 지내도 될까?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만나서 느린 대화를 나누게 되는 사람들과 보낼 시간도 부족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