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 합의에 의한 것이어야 했는데 다시 만나보니 내 일방적인 선언이었나
육 년간 스윙댄스라는 취미를 가졌다. 코로나19를 계기로 그 커뮤니티에 발길을 끊은 지 삼 년째, 어느새 이 취미는 과거형으로만 말하게 되었다. 언제가 기점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살면서 줄곧 취미란 친구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취미를 매개로 많은 친구를 사귈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취미 그 자체가 삶의 기쁨이자 자산이 되는 경우가 더 많았고, 한 번 열정을 쏟았던 취미는 시간이 가고 그 열정이 한풀 꺾인 뒤에도 여전히 내 취미 목록에 차곡차곡 쌓아왔기 때문이다. 마치 한 번 친구가 되고 나면 특별하고 분명한 절교 사유가 없는 한 친구였음을 과거형으로 말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스쿠버다이빙을, 여행을, 뮤지컬관람을, 자전거 타기와 글쓰기를, 상황과 대상에 따라 적당히 가감하며 내 취미라고 소개한다.
위에 열거한 다른 어떤 취미보다 자주, 정기적으로,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하던 스윙댄스라는 친구는 지난 삼 년 중 어느 시점엔가 나와 절교한 것이 분명했지만 난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또 사건들이 내 인생에서 행하는 나름의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을 마쳤을 때 퇴장한다고 이해했기에 이유를 굳이 알려하지도 않았다. 빚졌다고 생각할 만큼 크고 고마운 역할을 해 주었던 육 년이 이 친구에게 주어진 시간의 끝이라고 생각하면 아쉬움도 서운함도 없이 자연스러웠다.
과거형이 되어버린 그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여러 가지 이유를 주렁주렁 달고도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여러 차원에서 등을 떠미는 사람들이 많아서 못 이기는 체 스윙화와 갈아입을 옷, 그리고 마음도 준비했다.
플로어에는 태반이 모르는 사람이지만 흐른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똑같은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도 간간이 눈에 띄어서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지난 삼 년간 나에게 있었던 크고 작은 변화들을 떠올렸다. 매주 춤추느라 하루나 이틀 저녁을 꽉 채워 보내던 시간은 물론이고 동호회 내부의 사건과 사람에 쏟던 에너지를 아끼니 자연히 내 시간이 더 많아졌고, 여행도 더 많이 가고 내 책도 낼 수 있었다. 전과 다름없이 스윙바를 지키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도 떠나 있던 시간이 있었을 테니 그 시간을 채운 각자의 이야기가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일면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짜고짜 붙잡고 그간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모두의 지난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손을 맞잡거나 등을 감싼 상태로 움직이지만 끈적하지 않고 유쾌한 스윙댄스라는 춤의 특성이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하고, 또 ‘적당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나오니 어떠냐고, 사실 별로 궁금할 리도 없는 리더(남자 댄서)들의 질문도 매우 따뜻했다. 물론 팔뤄(여자 댄서) 중에서도 따뜻한 사람 많겠지만 손 잡을 일이 없다 보니…
문득 ‘이제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말이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한창 때도 닉네임 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는데 그때 알면 뭘 더 알고 지금 모르면 뭘 그렇게 모를까. 그럼에도 아주 친근하고, 아주 애착이 가는 아주 이상하게 특별한 커뮤니티. 우리는 분명 친구는 아니지만 비교하자면 중고등학교 동창과 아주 비슷하다. 짓궂은 시간을 사뭇 진지하게 보냈지만 지금은 어른의 삶을 사는 서로를 응원하는. 그때 누가 싫고, 피하고 싶고, 짜증 나고, 진저리까지 났던 그런 복잡한 마음들은 다 간 곳 없이 사라지고, 다들 바쁜 생업 중에 이렇게 건강하고 힘차고 따뜻해줘서 고맙다는 생각만 든다. 역시 한 발 멀리 떨어지니 다 너그러워진다.
이미 끝난 사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아니면 <환승연애>에 출연하는 엑스들처럼 지난 인연에 대한 미련일까. 절교는 상호 합의에 의한 것이어야 했는데 다시 만나보니 내 일방적인 선언이었나 싶다. 오래 만나지 못한 중고등학교 동창을 굳이 만나는 횟수로 친구다, 친구가 아니다 가를 필요는 없으니까. (혼자) 절교한 줄 알았던 친구를 다시 만나 (혼자) 화해했다. 기분에 취해서 앞으로 매달 한 번은 출빠 해야지 하고 호기롭게 내뱉었다. 지하철 타고 집에 오는 길이 너무 멀어서 취소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