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일기 Day 18 원두커피

일회용 종이컵 + 종이 홀더 + 플라스틱 뚜껑

by 해달 haedal

종이컵에 담긴 따뜻한, 아니 뜨거운 커피의 매력은 대단하다.


손에 주는 온기며, 은은히 스며 나오는 향이며, 뚜껑을 잠깐 열 때면 공간에 번지는 커피 향이며, 익숙한 보편적 형태에 다양한 색과 무늬의 종이컵과 홀더 등... 감각적으로 오감을 만족해준다.


특히 종이컵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 하지만, 이 매력을 끊었다. 플라스틱 뚜껑이 가장 문제이지만, 종이컵 안에 바르는 방수 코팅도 의심스럽다. 종이도 무한정 이렇게 한 번 쓰고 버릴 순 없다. 그 많은 나무...


그럼에도 '그렇게까지 해롭기야 하겠어. 전 세계에서 쓰는데...' 오히려 종이컵을 위해 변호해주면서, 단 플라스틱 뚜껑은 받아오지 않고, 종이컵만 사용하는 정도는 스스로 허용했다. 뚜껑의 경우 간혹 어떤 매장에서는 쏟아질 것을 우려해 뚜껑을 안 가져가면 곤란해하기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빨대 결코, 뚜껑은 웬만해선, 받아오지 않고 있다. 그러던 중 종이컵 사용에 회의가 들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언젠가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중, 역내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한 적이 있었다. 역에서 조금 여유 있게 도착해 마시는 커피는 여행이나 장거리 이동의 꽃. 코로나 이전에는 열차 객실에서도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는 큰 즐거움을 누렸으나 지금은 열차 내 음료나 음식 섭취는 금지.


커피가 나왔고, 무슨 일인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들고 이동하다 쏟고야 말았다. 살짝 손등을 데었다. 차가운 얼음물을 티슈에 적셔 연신 누르면서 분명히 깨달았다. 이 고온에 녹지 않을 종이컵 내부의 코팅이 있을까? 어느 정도는 식혀 마시기는 하지만 이 뜨거운 커피가 나의 식도와 위를 얼마나 힘들게 할까?


또 저렴한 플라스틱은 내열 온도가 낮은데, 플라스틱 뚜껑을 덮어도 되는 건가? 그걸 통해 마셔도 되나? 일회용 컵 뚜껑이 정말 안 좋은 석유화합물이라고 일러준 아는 동생 화학공학 박사의 말도 생각났다. 이후 종이컵은 나의 세계에서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오랜만에, 커피 매장에서 받아온 1년간 모아두었던 일회용 종이컵을 보니, 이걸 내가 다 마셨구나... 새삼 감회에. 요즘은 대체로 텀블러나 보틀을 습관적으로 들고 다녀 종이컵에 마시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보니, 종이컵이 갖던 매력도 나로부터 아득하게 멀어졌다.


좋은 의미로, 시야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구나, 역시.

Out of sight, out of mind.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 그 좋아하던 종이컵도 이제는 덤덤해진 걸 보니.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것이 거의 습관으로 정착하기까지 여정은 제법 시간이 걸렸다. 돌아보면,


진화


예전에는 매장에서 주는 대로 받아왔다.


1st 업그레이드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지만, 아직 습관이 되지 않아 매장에 가서야 생각나곤 했다. 2017년 말부터 2018 연말까지 대략 한 해 동안 내가 소비한 1회용 컵들이다.


s_20201218_112040.jpg 2018년 한 해 동안 모은 1회용 컵



2nd 업그레이드

텀블러를 깜박하거나, 가방에 짐이 좀 많을 때 텀블러를 챙겨가기 부담스러울 때를 대비할 겸, 텀블러가 습관이 완전히 되지 않아서 깜박할 때를 대비해 뚜껑과 홀더를 하나씩 가방에 챙겨두었다. 간혹 영화관 등 뚜껑이 없어 커피나 기타 음료가 쏟아지면 곤란한 경우가 있고, 커피숍 내에서도 뚜껑을 권할 때가 있다.


크기가 다른 두 개, 흰색으로, 홀더는 하나만 챙겨서 파우치에 넣어두고 들고 다녔다. 생각보다 잘 쓰이지는 않았지만, 텀블러를 더 챙기는 동기를 북돋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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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rd 업그레이드 : 습관화된 텀블러

드디어, 텀블러를 깜박하는 날이 한 달에 며칠 안 되는 날이 왔다. 간혹 외출 시 의식적으로 텀블러를 안 가져가는 날이 있긴 하다. 가방에 짐이 너무 많거나, 매장이나 식당 방문이어서 텀블러가 필요 없거나 등의 상황이 충분히 예상이 될 때이다. 어쩌다 발생하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종이컵에 담아 마시더라도 1년에 손꼽을 정도이기 때문에 나에 대한 상으로 생각해서 마음 가볍게 분리 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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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th 업그레이드 : '머그에 주세요!' 반드시 얘기. 그리고 이해

매장에서는 꼭 머그에 달라고 얘기했다. 머그가 없는 테이크아웃 전용매장이 아니어도 습관적으로 테이크아웃 잔에 주는 경우가 많다. 가게 운영하는 분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손님들이 매장에서 마셔도 테이크아웃 잔에 원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운영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잔에 주었다가 테이크아웃 잔에 달라고 하면, 괜히 설거지만 늘어나고 커피도 식고 두 번 일을 하는 셈.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보통 매장 밖에서 마시는 사람들은 테이크아웃임을 밝히지 않을까? 운영자 입장에서는 머그보다 테이크아웃이 설거지 부담이 없어 훨씬 편할 것 같다.


텀블러를 가지고 있을 경우 매장에서 마시러 왔는데 종이컵이나 투명 컵에 담으면 눈뜨고 코베인 기분이 든다. 가방 부피가 늘어나도, 간혹 텀블러로 가방 안에 오염이 생기는 경우가 있어도, 씻고 말리는 수고를 하면서, 내 돈 주고 텀블러 사서, 텀블러 들고 다닐 수 있는 가방까지 마련해서, 매장에도 사소한 이득을 주는데도... 물어보지도 않고 1회용 테이크아웃 잔에 주다니...


하지만 뒤집어 보면, 그분 말처럼 사람들이 1회용 테이크아웃 잔을 당연시하는 소비문화가 더 큰 원인이다. 상인들은 팔기 위해서 소비자들이 원하는 대로 맞추는 경향이 있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어야 더 잘 팔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회사 다니던 때를 생각해보면, 점심 식사 후 맛있는 원두커피 한 잔 사러 동료들과 같이 매장에 가서 마시면서 기분 전환하다가, 다 마시지 못하니까 들고 사무실로 와서 일하면서 마저 마시기도 한다. 테이크아웃 컵을 들고 거리를 걷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다. 따뜻한 종이컵은 온기가 좋고, 시원한 음료는 냉기가 또 좋다.


다행히도, 텀블러나 물병을 들고 다니는 거리 풍경을 우리 모두 같이 만들어 가고 있다.


5th 업그레이드 : 튀어도 괜찮아, 유별나도 좋아

다른 사람들과 다 같이 뭔가를 주문하는 상황이 있다. 한국사람이라면 튀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남이 튀는 것도, 자신이 튀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유난스럽다 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하고,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것도 좀 신경이 쓰인다. 모인 1회용 컵에는 그런 이유로 생긴 녀석들도 몇 있다.


하지만, 인간이 뭐라고... 지구 구성원 중 하나일 뿐인데, 그리고 후손들을 생각하면 그런 건 대수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보통 남녀불문 나이상 막내가 커피 주문 심부름을 하는 문화. 가지고 다니는 텀블러를 내밀면서, '저는 여기에 좀 담아주세요'.라고 한다.


내가 사러가지 않는 이상, 여러 여건상 플라스틱 뚜껑이 닫혀서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종이컵까지만은 내가 좀 해로운 것 먹고 말지로 끝나지만, 플라스틱 뚜껑까지는 안 된다. 종이컵의 녹아내리는 코팅만큼이나 해롭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100년을 가는데 내가 뭐라고, 한 번 마시고 말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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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nhattan Transfer, Java Jive https://youtu.be/0XxsasUHzaQ


10cm, 아메리카노 https://youtu.be/OmJYbdRfDN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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