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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haedal Jan 22. 2021

Day5 안개와 안개꽃

안개꽃 재서술


온종일 안개가 가득했다. 



요즘은 안개를 마냥 낭만적으로 보고 있지 못한다. 스모그를 의심하고 미세먼지 농도를 모바일 날씨 앱에서 체크하게 된다. 시 구 군/동 레벨의 지역 맞춤 정보가 실시간으로 제공되고 있다. 찾아보니 다행히 미세먼지는 '보통'. 편안한 마음으로 안개를 느낄 수 있겠다.



디지털 월드에 살고 있고, 특히 한국은 이런 면에서 세계 톱이다. 이런저런 정보를 자주 접하며 살게 되지만 그래도 우리 몸은 아날로그. 꽃을 보면 즐겁고, 푸른 잎이 기분 좋다. 


(화분 식물의) 줄기를 잘라내어 물에 담가두면 뿌리가 생긴다. 앞서 잎이 몸통인 식물의 잎이 웃자라 잘라서 물에 담가뒀는데 이 녀석은 어찌 된 일인지 감감무소식. 꽃도 비슷한 녀석이 있다. 안개꽃이다. 워낙 꽃이 작고 물기가 없어서인지 물이 없어도 잘 지내는 것 같다. 


예전 꽃다발의 클리쉐는 주연인 장미꽃을 받쳐주는 배경인 안개꽃. 그런 확실한 주연 조연 관계가 지루하고 비인간적(?)으로 느껴져서, 사실 꽃다발은 그날의 주인공에게 수많은 조연들이 선사하며 '오늘은 주인공은 당신입니다'라는 전언을 담고 있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장치이자 상징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진부하게 느껴져서 개인적으로 꽃다발을 살 때 안개꽃을 거의 섞지 않는다. 


비록 장미는 비싸고 장미에 필적할 만큼 존재감을 과시하는 꽃들도 비싸지만, 장미꽃 한 송이 혹은 몇 송이를 풍성해 보이게 해주는 안개꽃으로 풍성함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단출한 느낌의 싱그러움을 택한다. 


그런데 가족 중 누군가 받아오는 꽃다발 혹은 내가 어쩌다 받는 꽃다발에는 안개꽃이 섞여 있을 때가 있다. 다른 꽃들이 시들어갈 때, 혼자 시들지 않는 꽃, 그것이 배경을 이루고 빈 곳의 허전함을 채워주는 안개꽃이다. 



배경을 이루던 안개꽃, 주인공이 되었다.



예전에는 빈 곳의 허전함을 채워주는 안개꽃의 공간적 기여에 주목했다. 여백을 즐기는 나는 그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화분으로 식물을 키우게 되면서 식물의 변화에 좀 더 민감해졌고, 그래서인지 안개꽃의 시간적 성격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생각과 관심이 달라지니 이전과는 다른 측면을 보게 되고 다르게 보인다. 




미국의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자 중에 리처드 로티라는 분이 있다. 돌아가셨다. 그분은 재서술(redescription)이라는 어휘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하나의 절대불변의 진리가 갖는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비판하고 어떤 것이든 재서술함으로써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게 여겨질 수 있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클리쉐였던 안개꽃이 내게 그런 재서술을 이끌어내었다. 





이 가녀리고 가볍고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는, 공간에 점점이 수를 놓으며 낮시간에도 작은 허공에 하얀 별을 만든다. 낮에 나오는 반달이 문득 떠오른다.



안개꽃의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는 언제였을까. 처음부터 반쯤 대기의 수분으로 살아갔으려나... 대기 중 이산화탄소 포집 기술이 있듯이 대기 중의 수분도 모아서 식수를 만든다는 과학 기술에 관해 읽은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 습도! 여성들이 (요즘은 남성들도) 추구하는 피부의 촉촉함, 보습은 피부가 물기를 보유하는 정도와 연관된다. 


이 예쁜 안개꽃은, 공기 중의 물을 먹고 사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안개꽃을 옮겨 놓는 순간, 바싹 마른 잎 몇 개가 우수수 떨어졌다. 음... 생물에서 비생물의 경계를 넘어갔는데 워낙에 수분이 별로 없던 녀석들이라 색과 형태의 변화를 거의 겪지 않은 것일 뿐이구나.


바싹 마른 안개꽃은 예쁜 형태로 점점이 남고, 대신 베란다 창문을 열고 창 밖의 촉촉한 안개 낀 공기를 잠깐 들이마셔본다. 마스크 없이 마음껏 산책하고, 마음에 드는 카페에서 노트북 들고 가서 브런치 글을 쓸 날이 오길.


여의도 쪽 풍경. 코로나 사태로 준공을 미룬,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 미술관을 설계한 분이 설계한 여의도의 새로운 랜드마크 건물이 멀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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