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시선, 아빠의 시간
할아버지의 삶은 아빠의 인생을 바꿨다.
20대의 아빠는 대학을 중퇴했고, 생계를 책임지며 쌀가게를 이어갔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그 선택이 아빠의 삶에 남긴 흔적을, 그리고 그 속에서 아빠가 어떻게 자신을 만들어갔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할아버지는 평생 이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념을 품고 살아오셨다. 고향을 떠나온 아픔과 언젠가 돌아가겠다는 다짐은 그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었다. 동시에 그는 이웃들에게 신뢰와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가셨다. 하지만 그 이상은 현실과 충돌했고, 결국 가족의 삶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가게에서 번 돈은 할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금으로 모였지만,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데도 자주 쓰였다. 쌀을 외상으로 주거나, 돈을 빌려주는 일은 가게의 일상이었다. 그 무게는 가족 모두가 나눠서 짊어져야 했다.
언젠가부터 할아버지는 점차 건강이 나빠지셨다. 중풍으로 시작된 병세는 심각해졌고, 몇 년간 병상에 누워 계시다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대학에 다니며 회계 관련 일을 꿈꾸던 아빠는 할머니 혼자 가게를 운영하게 둘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쌀가게 사장이 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아빠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다. 쌀가게를 이어받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것은 그의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는 매일 새벽부터 쌀포대를 나르고, 가게를 지키며 하루를 보냈다. 아빠는 꿈 많던 20대에 삶의 무게를 받아들여야 했다.
언젠가 나는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는 쌀가게 말고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어요?”
아빠는 옅은 웃음을 띠며 말씀하셨다.
“하고 싶은 일이야 많았지. 근데, 언제나 뜻대로 되는 건 아니더라고. 좋은 게 좋은 거다~는 마음으로 살아왔지.”
그의 대답은 단순했지만, 그 속에는 무수한 희생과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가 담겨 있었다. 꿈을 접어야 했던 아빠는 그 선택을 후회하기보다는 묵묵히 받아들이며 가족을 위해 자신을 던졌다.
아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스물한 살, 여전히 부모님의 보호 아래에서 따뜻하게 살아가던 나와는 너무도 다른 삶. 그 시절의 나는 누군가의 무게를 나누어질 준비조차 되지 않은 그저 21살 대학생, 딱 그뿐이었다. 그러나 아빠는 그 나이에 자신의 미래를 뒤로하고, 자신의 꿈을 접고,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가장 중요한 선택을 했다.
나는 가끔 상상해 본다. 내가 그 상황에 놓였다면, 과연 아빠처럼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누군가의 삶을 위해 나의 길을 포기하고 주어진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일일까.
아빠의 선택은 현실 앞에서의 타협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족을 향한 깊은 책임감과 사랑의 결정이었다. 아빠는 그 시절을 돌아보며 종종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쉬움은 있지만 원망은 없다.”
그의 말속에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살아온 시간이 담겨 있었다. 부모님을 원망하기보다는 현실을 긍정하며 나아갔던 그의 시선은 단순히 상황을 받아들인 것을 넘어, 그가 삶 속에서 선택한 태도였다.
지금의 내가 이해하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다르지 않다면, 그 속에서 아빠가 내린 결론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으리라. 그게 우리 아빠니까.
아빠는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삶을 단순히 짐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미를 찾아가며 살아가셨다. 그는 삶의 무게 속에서도 긍정의 시선을 잃지 않았고, 가족을 위해 묵묵히 걸어왔다. 그의 발걸음은 때로는 무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걸어온 길을 후회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나의 관점에서 아빠의 삶은 가족을 지탱하기 위한 희생의 연속이다. 그러나 정작 그 인생을 살아온 아빠는 한 번도 자신의 길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속에는 의미를 찾아가는 긍정과 담담함이 있었다. 나는 그런 아빠를 보며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바로잡게 된다. 우리가 어찌 다른 이의 삶을, 선택을, 쉽게 평가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는, 아빠의 삶이 단순히 한 개인의 희생의 기록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 시간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방법을 보여주는 소중한 교훈이다.
그의 삶 속에서 나는 단지 관찰자가 아니다. 그와 함께 시간을 공유한 딸로서 그 과정을 지켜보며, 세상과 마주하는 나 자신의 태도를 새롭게 배웠고, 그 속에서 의미를 잃지 않는 태도를 배워가는 중이다.
아빠는 그렇게 쌀가게를 이어가셨다. 7, 1, 40. 아빠의 쌀가게 인생을 나타내는 숫자들.
다음 글에서는 그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묵직하고 위대한,
나의 아빠, 나의 영웅.
존경하는 담윤님께 이 글을 바칩니다.
아빠라는 이름은 늘 묵직했습니다.
그 무게를 가늠하지 못했던 어린 날부터, 조금씩 그를 이해하게 된 지금까지.
위로만 느껴지던 아빠의 존재는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내 안에 스며들었습니다.
시장 한가운데 쌀가게에서 시작된 아빠의 삶.
딸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의 시간 속에서 발견한 사랑과 희생, 그를 통해 배운 것들.
그리고 전하고 싶은 아이의 고백.
이 이야기는 아빠와 나, 그 사이의 시간과 사랑의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