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시선, 아빠의 시간
우리 집은 시장길 한가운데 있는 쌀가게에서 시작됐다.
할아버지가 시작한 쌀가게는 아빠에게,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삶의 터전이었다.
피난길에 내려온 할아버지가 쌀가게를 시작하며 만들어 낸 이야기,
그 속에서 아빠는 착하고 순한 아들로,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성장했다.
2부에서는 그 역사가 아빠에게,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돌아보고자 한다.
내 삶은 시장 한가운데 자리한 쌀가게에서 시작됐다. 이른 새벽, 상인들의 분주한 발걸음과 소음이 시장을 깨우고, 가게 셔터를 올리는 소리는 우리 가족의 하루를 여는 신호였다.
집은 마당을 끼고 가게와 연결되어 있었다. 집 안 곳곳에는 쌀 냄새가 배어 있었고, 쌀자루들이 우리 생활의 일부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처음 이곳에서 쌀가게를 시작한 이야기는 가족의 역사를 이루는 첫 장이었다.
가족의 터전이 된 공간
할아버지는 피난길에 이북에서 내려와 부산에 뿌리를 내리셨다. 이 곳에서 할머니를 만났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안정된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셨는데, 그때 할머니가 제안한 것이 쌀가게였다. 사람들이 매일 먹는 쌀이라면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단순한 이유였다. 그 판단은 옳았다. 가게는 꽤나 잘 운영되었고, 할아버지는 그 속에서 삶을 이끌어가셨다.
그에게 쌀가게는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번 돈으로 땅을 사자, 건물을 사자”고 말씀하셨지만, 할아버지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언젠가 이북으로 돌아가겠다는 신념을 품고 있었고, 그 신념은 그를 더욱 절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벌고, 모으고 또 모은 돈은 상당 부분 주변 이웃들에게 흘러갔다.
이상과 현실 사이
할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쌀을 빌려주거나 돈을 빌려주셨다. 그는 ‘사람을 믿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신념을 갖고 계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신뢰는 항상 돌아오진 않았다. 채무가 쌓이고 가게가 어려워질 때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서운함을 토로하셨다. “우리 집도 부족한데, 왜 다른 사람들 먼저 챙겨요?” 할아버지는 항상 같은 대답을 하셨다고. “사람이 배고프면 아무것도 못 해. 이웃부터 배불러야 우리도 살 수 있는 거야.”
어린 시절, 아빠는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착하고 순한 아들로 자랐다. 그는 가게 일을 돕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쌀자루를 나르며, 할아버지의 철학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균형은 언제나 쉽지 않은 법.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가 남긴 채권 장부는 점점 무거운 짐이 되었다. 이후 아빠가 쌀가게를 접으실 때, 그 장부는 태워졌고, 함께 사라졌다. 아빠는 말씀하셨다.
“이걸 간직한다고 의미가 없더라. 그냥 마음만 무거울 뿐이지.”
단순한 공간 그 이상의 의미
어린 나에게 쌀가게는 단순한 놀이터이자 생활 공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나도 고사리같은 손으로 아빠의 일을 도와드리며, 그곳에서 할아버지와 아빠가 겪었던 고단함과 희생을 되짚어보게 되었다.
무거운 쌀자루를 나를 때마다 아빠는 가족의 무게를 느꼈을 것이고, 손님들에게 정성을 다해 쌀을 나눠줄 때마다, 그는 삶의 소중함을 배웠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빠가 이어온 쌀가게는 우리 가족이 이어온 삶의 터전이었고, 내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책임이 담긴 공간이었다. 할아버지가 남긴 신뢰와 나눔의 정신은 아빠의 삶에도 깊이 스며들었고, 그 마음들은 내게까지 이어졌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가던 어느 날, 대학생인 아빠는 계획에도 없던 쌀가게 사장이 되었다.
이세상에서 제일 묵직하고 위대한,
나의 아빠, 나의 영웅.
존경하는 담윤님께 이 글을 바칩니다.
아빠라는 이름은 늘 무거웠습니다.
그 무게를 가늠하지 못했던 어린 날부터, 조금씩 그를 이해하게 된 지금까지.
위로만 느껴지던 아빠의 존재는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내 안에 스며들었습니다.
시장 한가운데 쌀가게에서 시작된 아빠의 삶.
딸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의 시간 속에서 발견한 사랑과 희생, 그를 통해 배운 것들.
그리고 전하고 싶은 아이의 고백.
이 이야기는 아빠와 나, 그 사이의 시간과 사랑의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