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해야하는 한 가지
아기가 태어나고 모유 수유를 했다.
그렇게 두 달쯤 지났을 때 처음으로 2시간 정도 혼자 외출을 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집에 있는 아기와 연결된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아기가 지금 느끼는 것을 같이 느끼는 것 같았다.
탯줄로 연결된 것처럼 그렇게 아기와 나는 여전히 한 몸이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엄마와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있게 된다.
안아야만 이동을 할 수 있고 먹여줘야만 먹을 수 있다.
24시간 엄마와 함께 있던 아기가 점점 커서 어느 순간 혼자서 대부분을 할 수 있게 성장한다.
가장 큰 분리를 느끼는 시기가 사춘기 즈음일 것이다.
아이는 청소년이 되고 더 이상 눈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해줄 수 없는 나이가 된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아이가 떠나지 않는다.
표정이 안 좋은 건 왜 그럴까?
내가 뭘 더해줘야 이 아이가 좀 더 수월하게 지나갈 수 있을까?
뭘 도와주면 더 잘할 수 있을까?
일일이 다 아이에게 말을 하고 물어볼 수도 없고 어느 때는 머릿속에 아이에 대한 고민들로만 가득 차서 괴로울 때도 있었다.
"내가 뭘 더 도와줄 수 있을까?" 이 물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것만 같아 / 초조해져
김윤아 - ⌈ Going Home ⌋ 중
원래 좋아했던 노래였지만 아이가 사춘기를 지나면서 이 노래의 가사가 더 마음에 와닿았다.
내가 뭘 더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자꾸 마음이 초조해졌다.
근데 막상 하려고 보면 내가 대신 살아줄 수가 없다.
아이가 혼자서 헤쳐나가야 하는 하루하루이고 본인의 인생이다.
엄마가 대신해 줘서도 안된다.
스스로 이겨나가는 힘을 길러야 한다.
하지만 내 마음은 내가 무언가를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자꾸 불안하고 힘들었다.
탯줄을 자르고, 처음 엄마와 떨어져서 유치원을 가고, 아이 혼자 외출을 하게 되는 육체적인 분리의 순간들은 눈으로 보여서 비교적 쉽다.
하지만 사춘기를 지나면서는 정서적 분리가 필요하고 어느 지점을 잘라내야 하는지 보이지 않는다.
답답하고 막막한 순간이었다.
내가 학창 시절, 같은 시간을 지나왔을 때는 사실 그렇게 힘든지 몰랐다.
학교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서 바쁘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고 특별히 사춘기 시기가 더 힘들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때 내가 담담히 혼자 했다고 생각했다.
(아마 사춘기를 지나는 내 아이도 본인은 그렇게 힘들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 시간에 묵묵히 옆을 지키는 엄마가 있었다.
적극적으로 나를 끌어당기고 잔소리하고 간섭하지 않았지만 항상 엄마가 옆에 있었다.
고민하는 나를 따뜻하게 지켜보는 엄마가 있었고, 그래서 동요하지 않고 지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 늘 강물처럼 편안해 보였고 나에게 끝없는 믿음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었음을 이제 알겠다.
무언가를 대신해 줄 수는 없고, 고생하는 자식을 보는 안타까운 마음은 숨기고,
평온해 보이는 모습으로 옆을 지켜주는 것.
아무나 할 수 없는 숭고한 사랑이다.
그때 엄마도 나처럼 마음이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엄마는 자신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시간들 안에서 나를 응원하고 기도했던 것 같다.
'우리 딸은 똑똑하고 열심히 하는 아이이니 이 아이가 자기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세요.'
사춘기를 지나는 아이의 엄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도"이다.
기도라는 말이 너무 공허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도에는 힘이 있다.
우선 엄마 입장에서는 아이의 인생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빨리 받아들이고
늘 불만족스럽고 불안한 눈빛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엄마의 마음이 편하고 표정이 온화해지면 아이의 불안도 줄어든다.
자식을 믿어주는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그 믿음이 아이에게 전달된다.
부모가 "너는 무슨 일이든지 끝까지 잘하는 사람이야."라고 얘기해 주면
아이는 스스로를 끝까지 잘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게 되고 그 모습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다.
부모가 흔들림 없이 "너는 충분히 할 수 있다"라고 얘기해 주면
아이는 스스로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나간다.
부모의 피드백이 중요하다.
아이는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아이가 자신을 그려나가는 첫 시작이 부모의 말인 것이다.
이러한 부모의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이의 내면에서부터 보이지 않게 차곡차곡 내면의 힘을 기르게 해준다.
기도하는 부모는 아이의 결점을 찾는 것보다 아이에게 끊임없이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다.
무한히 아이를 신뢰하는 눈빛에서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자존감이 높아지고 자신감이 생긴다.
법륜스님은 자식이 잘 되길 바란다면 이렇게 기도하라고 한다.
"우리 딸은 잘 살고 있습니다.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저는 아무 걱정도 없습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자꾸 조금이라도 더 좋게 해주기 위해서 안달하던 마음을 버리고 아이가 잘 살고 있다고 기도하고 나니 거짓말처럼 내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불안을 내려놓으니 아이에게 더 웃어주고 진심으로 칭찬해 줄 수 있게 되었다.
부처님이든 하느님이든 누구에게든 기도를 하자.
이는 아이를 믿어주는 것이다.
엄마가 흔들리지 않고 아이를 믿고 따뜻하게 지켜봐 준다는 것이 아이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엄마가 나서서 무엇을 해결해 주려는 마음을 버리고 아이를 정서적으로 분리시키자.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나갈 수 있도록 이제 엄마가 유일하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다.
뭘 더 해줘야 할 것 같아서 마음이 불안하고 힘들 때 맥아더 장군의 기도로 아이를 응원하는 지혜로운 엄마가 되자.
주여, 제 아들을 이런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약할 때에 자신을 강하게 하고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게 하며
정직한 패배 앞에서도 당당하고
승리의 때에도 겸손하게 하소서.
주여, 원하오니
그의 마음이 깨끗하고 목표가 높은 사람이 되게 하시고
남을 다스리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알게 하시며
비웃음을 당할지라도 결코 비웃지 않게 하시고
원수를 맞서 싸울 줄 알되, 미워할 줄은 모르게 하소서.
주여, 원하오니
그에게 미래를 향해 나아갈 줄 아는 용기와
과거를 돌아볼 줄 아는 겸손함을 주소서.
그리고 주여, 제가 이런 것을 다 구하였지만,
그를 행복하게 하시기보다는
그가 남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으로 키워 주소서.
그만하면 제가 너무 많은 것을 구하지 않았으리라 믿습니다.
그가 그런 사람으로 자라면
저는 감히 말하겠습니다.
“내가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