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지금처럼 초등학생들이 보편적으로 영어 학습을 하던 시기는 아니었다.
6학년 때 친구가 바보가 영어로 뭔지 아냐고 물었고(나는 그 아이보다 훨씬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아직 A, B, C, D도 모르던 때라 나는 모른다고 했다.
친구는 B, A, B, O라고 했고 그날 충격을 받아서 엄마에게 영어 학원을 다녀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너무 충격이 커서인지 하굣길에 이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중학생들이 공부하던 학원에 들어갔고 그렇게 처음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를 배우다는 것이 정말 재미있었다.
3년 정도 공부해서 시 대회에서 상도 타고 외국어 고등학교에도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영어는 예뻤고 어렵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그만큼 실력도 금방 늘었다.
아이를 낳고 보니 내가 공부했던 것과는 다르게 요즘은 영어를 어린 나이 아이들부터 시작했다.
영어유치원은 당연하고 그전에도 집에서 이미 영어 음원을 듣는다든가 영어로 된 책을 읽어주기도 한다.
아이들을 위한 영어 교육법이 낯설기도 하고 시기나 방법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이미 공부를 많이 했던 분야였음에도 새로운 접근법이라
아이들의 영어 학습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다.
무엇보다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영어 학습량이 많았다.
그것을 따라가야 하는지, 많은 아이들이 하고 있기 때문에 안 따라간다면 내 아이들만 낙오되는 건 아닌지,
과거와 현재가 많이 달라져서 내가 했던 공부 방법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인지,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을 했다.
나의 경험과 영어 학습의 본질에 대해서 계속 고민하면서 많은 결정들을 했고
결정을 할 때는 불안하기도 했지만 내 판단이 맞았다.
영어 학습에 대한 정보도 학습 방법도 넘쳐나는 교육 시장에서
부모가 흔들리지 않고 아이들에게 맞는 영어 공부를 도와주기 위해서는
부모가 확실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선 아이의 미래에 대한 대략적인 계획이 어떤지에 따라 영어 학습법은 크게 달라진다.
첫 번째는 가족 전체가 이민을 간다거나
아이가 미국 등의 나라에 정착해서 한국에 들어오지 않고 살게 하게 싶다는 바람이 큰 경우이다.
영어권 나라의 학교로 진학을 희망하는 경우는
어릴 때부터 모국어 습득방식으로 영어를 받아들이고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를 편하게 사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이런 경우는 어릴 때부터 모든 소리를 영어로만 들려주고
영어유치원에 진학하고 영어원서를 계속 보는 것이 맞다.
영어 노출이 다다익선이다.
두 번째는 영어를 잘하게 하고 싶지만,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오고 한국의 대학교로 진학을 희망하는 경우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여기 속할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는 모국어가 제일 중요하다.
영어는 그저 도구일 뿐이다.
모국어가 완벽히 자리 잡고 영어는 그러한 완전한 사고체계를 언어만 바꿔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들의 고등학교까지 학습과 대학 입시까지의 학습에서 한국어 능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모국어의 발달은 단지 어휘를 조금 더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정서와 미묘한 뉘앙스를 체득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겪는 경험들이 모두 그 바탕이 되는데,
한국어를 절대 사용할 수 없는 환경에서 몇 년간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자칫 아이에게 영어가 더 우위에 있는듯한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또한 가사가 예쁜 우리말 동요를 들으면서 정서가 발달하고
전래 동화를 읽으면서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유치원에서 영어 이름이 따로 있어서 김제득이 아니고 제이미로 불리고
곶감보다 마시멜로를 먼저 알고 추석보다 핼러윈이 익숙해지는 것이
정체성이 형성되는 시기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
나는 아이들이 한국 대학에 진학하고 한국에서 뿌리내리고 살길 바란다.
자신들이 공부를 하다가 미국을 가고 싶어 한다면 그것도 응원하지만
내가 그쪽으로 끌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영어는 잘했으면 좋겠다.
아이들의 영어 학습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어릴 때 영어를 접하면 발음이 확실히 좋은 특장점이 있다.
나도 두 아이들을 모두 유치원부터 영어 공부를 시켰다.
하지만 영어만 사용해야 하는 유치원은 아니었고
한국어로 하는 수업과 영어로 하는 수업이 모두 있는 유치원을 다녔다.
그리고 집에서 따로 영어만 들려준다거나 영어책만 읽어준다거나 하지 않았다.
유치원 시기 아이들은 따다다다 따발총처럼 갑자기 말이 유창해지고 풍성해지는 시기이다.
모국어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그 시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모국어의 유창성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집단 안에서 아이의 위치를 결정짓기도 한다.
교과서를 또박또박 읽고 발표를 잘하는 자신감,
선생님, 친구들과 적절하게 소통할 수 있는 사회성의 바탕이 된다.
특히 영어에 노출시키는 정도는 아이가 한국어를 얼마나 잘하는지에 따라서도 다르다.
유난히 말이 느린 아이를 영어유치원까지 보내면 아이는 그 혼란스러움을 감당할 수 없다.
사람은 모두 타고난 재능이 달라서 언어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이 따로 있다.
그 아이들은 두 가지 언어를 모두 발달시킬 수 있다.
아이의 속도와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아이 인생에서 영어의 중요도에 따라서
아이의 교육 방향과 방법을 결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