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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경 Mar 11. 2017

내안의 죽음을 바라보다

내게 죽음과 존재, 살아 있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몇년 전부터 동기부여를 위해서, '죽음'을 생각해보라는 조언들이 이어졌다. 나는 그 조언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나에게는 죽음이 어떤 동기부여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조언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몇 달전 이었다. 나는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의문을 올렸고 그 의문에 데니스 홍 선생님께서 답변을 달아주셨다.

https://www.facebook.com/G3113/posts/10210362701098327

그래서 데니스 홍 선생님의 댓글에 대답해 드리기 위해서 한번 생각해보고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내안의 죽음을 바라보기 위하여, 죽음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Q방법론(주관성연구)의 일부를 차용해 새로운 틀을 만들었다.


"나에게 죽음과 삶은 어떤 의미인가?"

나에게 죽음과 삶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문장들을 만들었다. 내가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죽음이었으나, 삶은 죽음의 반대에 위치하는 것으로써 동시에 탐색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죽음과 삶의 의미를 탐색해보기로 했다. 다음에는 아래와 같은 절차를 거친다.


1.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문장들을 만들었다. 물론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문장도 만들었다.

2. 각각 만들어진 문장들을 동의할 수 있음,중간, 동의할 수 없음 이라는 세가지 그룹으로 분류 했다.

3. 그리고 동의할 수 있는 순서대로 나열 하고, 동의할 수 없는 순서대로 나열 했다.


위 절차를 거친 결과물은 다음과 같다.

이제 위 결과물을 통해 이미지를 추출하고 해석해볼 차례다.


죽음과 존재, 살아 있음에 대한 내 마음 탐색

- 열거된 문항들로 부터 추출된 '죽음' 이라는 이미지.


동의하지 않는 문항들을 우선 살펴 보자면, 나는 기본적으로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 죽는 순간 어떤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죽음에 대해 두렵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위협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또한 나를 자극하지도 않고, 양질의 삶을 만들도록 도와주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것은 죽음에 대해서 거리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볼때, 죽음은 나에게 어떤 자극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오히려 친숙한 것에 가깝다.


동의하는 문항들을 살펴보자면, 죽음은 나에게 절망에 가깝다. 하지만, 죽은 뒤에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존재하기를 희망한다. 또한 나에게 죽음이란 또 다른 시작 이기도 하다. 죽음은 나에게 해방이기도 하며, 나는 죽음을 원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죽음은 나에게 어떤 자극적인 무언가가 아니며, 도리어 친숙한 무엇에 가깝다. 여기서 '살아 있음, 존재함'에 대한 생각에서 동의하는 문항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가 태어난 것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

살아 있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 존재의 이유나 의미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여 하는 것이다.

죽은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육체적인 존재 보다, 개념적으로 존재하고 싶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나에게 '죽음'이나 '존재, 살아 있음'은 육체적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에게 죽음이나 존재는 개념적으로 의미를 가진다. 때문에 내가 죽은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고, 태어난 것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또한 '살아 있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설명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나에게 어떤 자극적인 무언가가 아니며, 도리어 친숙한 무엇에 가깝다.' 라는 것을 통해 내가 죽음이나 존재, 살아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나에게 육체적인 죽음은 의미가 없다. 나에게 죽음은 개념적인 것이다.


여기에 다른 문항들을 생각해보자, 나는 [존재] 관련 문항에서 가치있는 상상이나 생각을 할 수 없다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는 신체 기능과 관련된 문항들이 의미하는 것과 대비된다. 또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죽음] 관련 문항에서 죽은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다고 했고, 존재가 잊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를 위와 연결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나에게 육체적인 죽음은 의미가 없다. 나에게 죽음은 개념적인 것이다.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을 내가 가치있는 상상이나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에서 느낀다. 또한 내가 존재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죽은 뒤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가지고 싶어한다. 즉, 내 가치있는 상상이나 생각이 내가 죽은 뒤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가지기를 원한다.



재미있는 것은 다른 측면의 문항들에서 더 나타난다.


죽음은 절망과 같고, 내 무의식은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 삶에 대한 욕구를 의미한다. 물론 이는 육체적인 기능의 욕구가 아니라, 개념적인 욕구라고 봐야 한다.


삶은 인내와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것은 축복이 아니다. 나는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또한 내가 태어난 것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존재의 이유, 의미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여한다는 문항과 이어진다. 삶에 피로를 느끼고 있는것 같지만, 그걸 당연하게 여기지만 '죽음은 나에게 해방이다' 라는 문항에서 드러나듯 삶의 피로에서 해방되고 싶어한다.


나는 삶을 살면서 살아 있다는 즐거움을 다음과 같은 경우에 느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탁월한 상상과 생각을 하고, 어떤 것을 성취하는 것


또한 이것은 내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과 닿아 있다.

탁월한 상상과 생각을 하고, 어떤 것을 성취해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위의 문장이 내가 삶을 살아가는 욕구를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지고 있는 태도는 좀더 냉소적이다.


(2) 탁월한 상상과 생각을 하고, 어떤 것을 성취해서 영향력을 발휘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겪는 인내와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취급하고 이로 부터 벗어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내가 이를 통해 얻은 결론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은 내게 '죽음을 상상하는 것'이 왜 동기를 불러일으키지 않는지를 설명해준다.

(2)는 나를 움직이는 방법을 설명해준다. 나의 욕구를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2)에서 드러난 성향들을 활용하는 것이 '죽음을 상상하는 것'보다 내게 동기를 부여해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살아 있고 싶어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원히 존재하고 싶어하는 거대한 욕망을 지니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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