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이 벽에 부딪혔다.
짧은 충격이었는데도, 몸은 과장되게 반응했다. 금세 푸르스름한 멍이 올라오고, 피부는 그 아래에서 서서히 피를 모아갔다. 나는 통증보다 그 기계적인 반응이 흥미로웠다. 몸은 이유를 묻지 않는다. 사고의 의미도 계산하지 않는다. 다만 부딪히면 멍을 만들고, 그 색으로 자신이 받은 충격의 정도를 표시한다. 마치 자신의 몸에 메모를 남기는 '메멘토'처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선 머리에서 먼 기관일수록 통제가 쉽다고 했다. 그 말은 과학처럼 들리지만, 내 몸은 그런 정돈된 논리를 전혀 따르지 않는다. 먼 기관이든 가까운 기관이든 내 의지로 움직여지는 건 거의 없다. 팔은 때때로 내 허락 없이 삐그덕 대고, 다리는 조바심만큼 빨라졌다가 종종 휘청이고, 손은 결코 필요하지 않은 순간에 떨리기도 한다. 말 그대로, 내 몸이지만 나의 명령을 무시한다. 몸은 내가 계획한 인생 경로를 배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상처가 생기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멍이 들어 있다.
몸은 감정보다 훨씬 단순하고, 마음보다 훨씬 솔직하다. 나는 종종 마음의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지만, 몸은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벽에 찧이면 바로 멍이 생기고, 시간이 지나면 색을 걷어낸다. 마음이 하는 일은 언제나 그보다 번거롭고 지저분하다. 하지만 몸은 한 번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 실수라고 말하지도, 조심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저 반응할 뿐이다. 반응하고, 처리하고, 흡수하고, 뱉어낸다.
멍을 바라보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몸은 살아 있는 동안 끝없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장치라는 것. 내가 통제한다고 믿는 동안에도 몸은 자기 방식으로 나를 움직이고, 나를 대신해 충격을 흡수하며, 나 대신 불필요한 힘을 빼내고 있다. 때로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어떤 감정을 대신 떠안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유를 모르는 멍이 생겨 있는 날들은 어쩐지 마음 깊숙한 곳이 찔린 날과 겹쳐져 있기도 한다.
나는 그동안 멍을 '부딪힌 결과'라고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멍은 '이만큼은 견뎠다'는 하나의 인증처럼 보였다. 몸이 나 대신 외부를 받아들이고, 그 충격을 스스로 흡수했다고 알려주는 파란 글씨 같은 것. 아마 그래서 멍은 통증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상처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리로 보이기 시작한다.
살아간다는 건 결국 이런 메모들을 곳곳에 남기는 일과 비슷하다. 빨리 지워지는 메모도 있고,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메모도 있다지만, 몸은 그것들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그냥 자연스럽게 덧칠하고, 덜어내고, 뱉어내며 제 할 일을 한다.
멍은 단순한 자국이 아니다.
내가 지나온 하루가 남긴 흔적이고, 몸이 받아낸 충격의 양을 말없이 드러내는 표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멍 자체에 의미가 붙는 건 아니다. 그것이 생길 만큼의 일이 있었고, 그만큼 움직였고, 그만큼 부딪혔다는 사실만 남을 뿐이다. 나는 그 앞에서 불필요한 해석을 덧붙이지 않으려 한다. 아프면 아픈 대로 두고, 낫는 동안의 시간을 보내고, 자국이 남으면 남는 대로 받아들인다. 몸은 늘 그렇게 움직여왔으니까.
멍은 나에게 용기를 가르치지 않는다. 회복을 약속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정도 충격은 지나갔다"는 결론을 남긴다. 그 사실이면 충분한 것 같다.
나는 살아 있는 동안 계속 부딪힐 것이고, 몸은 그때마다 반응하며 제 나름의 방식으로 충격을 흡수할 것이다. 멍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하나의 징표일 뿐이고, 나는 그 사실을 오늘 조금 더 선명하게 이해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