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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이 내리던 길에서

by 해이

첫 눈이 내린 날, 회사에서 나와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을 때는 막 하늘이 무게를 풀기 시작한 때였다. 차가운 입자들이 공기를 채우며 서서히 바닥을 덮어 가는데, 퇴근길의 익숙한 회색빛 표면이 순식간에 낯설어졌다. 사람들 발자국 아래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더 분명하게 들렸다. 바쁜 퇴근 무리는 저마다 갈 길을 재촉했지만, 나는 버스가 오기 전의 그 짧은 사이에 걸음을 멈추게 됐다. 정류장 바닥에 붙어 있는 넓은 잎 하나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잎은 이미 누렇게 바래고 건조해져 있었지만, 중심부에 남아 있는 초록빛이 아직 다 사라지지는 않은 상태였다. 바람과 추위와 수많은 발걸음의 소란을 모두 지나쳐 여기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그 잎은 이전과 전혀 다른 표정을 띠기 시작했다. 벽돌의 거친 표면과 잎 사이에 얇게 쌓여가는 눈송이에 잎의 윤곽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냈다. 계절이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눈으로 보이는 동시에, '아직 남아 있는 계절'의 흔적도 분명히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잠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잎은 빠르게 변해 갔다. 내리는 양은 많지 않았지만, 입자 하나가 닿을 때마다 표면의 색이 달라졌다. 퇴근길의 바쁜 흐름 속에서 이런 장면을 마주하게 되면, 어쩐지 마음이 살짝 뭉클해는 순간이 온다. 정류장 모퉁이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나뭇잎 하나가, 계절의 변화를 설명하는 사진 한 장처럼 나의 시선을 붙잡았다.


버스에 올라타서도 그 장면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창밖은 점점 흐릿해졌고, 불빛은 하얀 눈송이에 부딪혀 퍼져 나갔다. 사람들의 대화와 라디오 방송 소리, 엔진 소음이 뒤섞여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아까 그 잎 하나가 덩그러니 머물러 있었다. 나는 오늘 하루를 정리할 겨를도 없이 흘러간 생각들을 다시 더듬어 보았다. 잎이 보여 준 것은 단순한 색의 대비가 아니었다. 지나간 계절과 다가오는 계절 사이에서 잠시 자신의 존재를 남기는 것이었다. 사라지는 중에도 자기 자리를 잃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마음의 흔적들. 잎은 말 없이 그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집 근처 정류장에서 내려 골목길로 들어설 즈음, 눈은 이미 바닥을 채우고 있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차가운 향이 폐 안으로 파고들었고, 바람이 조금 더 세게 불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입자들이 기묘하게 평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걷는 동안 바닥의 질감이 부드럽게 변해 가는 것이 발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골목길 끝, 익숙한 담벼락 옆에 놓여 있는 화분 앞에서 다시 한번 발걸음이 멈췄다. 이번에는 국화였다.




국화는 꽃잎의 색이 아직 분명했다. 가을 내내 피어 있었을 텐데, 초겨울의 밤에도 그 형태를 잃지 않고 있었다. 지붕 밑에 피어나 다행히 눈을 맞지 않은 국화의 주위로 눈이 높게 쌓여가고 있었다. 마치 두 계절이 동시에 그림을 그린 듯한 장면이 펼쳐졌다. 낮엔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햇빛 아래에서는 가을의 흔한 잔향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눈이 얹히자 전혀 다른 표정을 가졌다. 지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시기에도 색을 남기는 꽃과, 눈이 내려오는 초겨울 길 사이에서, 나는 이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이질감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연의 흐름이 정해진 규칙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꽃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그저 남아 있는 채로 시간을 맞이할 뿐이다. 그런데 그 모습 하나가 하루 동안 쌓였던 복잡한 기분들을 건드렸다. 어떤 마음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어떤 감정은 계절이 바뀌어도 여전히 모양을 유지한다는 것. 이미 지났어야 한다고 생각한 감정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꽃은 단지 자신의 자리에서 머물러 있을 뿐인데, 그 모습이 내 마음의 모양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


골목을 지나 집 앞에 서서 뒤돌아보니, 하얀 눈은 조금 더 쌓여 있었다. 잎이 붙어 있던 정류장의 바닥과, 꽃이 놓여 있던 화분, 그 사이를 잇는 길. 이 모든 장면이 하나의 흐름처럼 연결됐다. 자연은 매일 조금씩 표정을 바꾸지만, 그 중에서도 첫눈이 내리는 날은 참 많은 생각을 꺼내 놓게 된다. 낮과 밤, 따뜻함과 차가움, 남은 것과 사라지는 것. 이 두 사진이 보여 준 것은 계절이 주는 단순한 대비가 아니라, '머무르는 방식의 차이'였다.


정류장에서 본 잎은 이미 거의 생을 끝내고 있었지만, 끝까지 자기 색을 내려놓지 않았다. 골목에서 본 국화는 이 계절과 맞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꽃잎을 온전히 펼치고 있었다. 둘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날, 같은 길 위에서 마주하니, 마치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사라지는 것도, 남아 있는 것도, 완전한 형태로 흘러가는 일은 없다고. 계절은 전환되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무언가를 내려놓는 일도, 지나온 것을 보내는 일도,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나는 그 길을 천천히 걸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눈이 모든 것을 덮어도, 드러나는 것들은 더 또렷해진다는 사실을 다시 실감했다. 정류장의 잎과 골목의 꽃은 하루 안에 서로 다른 표정을 가진 두 계절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를 걷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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