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선물받았던 편의점 쿠폰으로 초콜릿을 산 날이 있었다. 지갑 사정을 생각하면 굳이 사지 않았을 사치였고, 그저 '무료'라는 이유로 허락된 순간이었다. 손바닥 위에 올리면 금세 녹아들어 미끄러지듯 반짝거리던 아몬드 초코볼. 얼른 입에 넣지 않으면 손이 지저분해지기 마련이라 서두르게 되고, 빨리 씹으면 또 그 안의 단단한 아몬드가 잇몸을 찌르며 통증을 남기기도 한다. 달콤함을 얻기 위해 물었는데, 그 안엔 예상치 못한 아픔이 섞여 있다. 의외로 다치기도 하고, 사치를 자주 누릴 수도 없고, 그래도 잊히지 않는 맛. 그 초코볼이 내 삶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포레스트검프에서 인생은 초콜릿상자와 같다고 했다. 무엇을 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을 나타내기도하고, 초콜릿들의 맛과 생김새가 모두 다르듯 인생도 예측할 수 없다는 변화무쌍함을 빗대기도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현실적인 진실을 초코볼에서 본다. 인생은 이미 손에 쥔 초콜릿을 어떻게 먹냐에 더 가깝지 않을까. 선택이라는 건 화려한 상자 안에서 고르는 일이 아니라, 이미 손바닥에서 녹기 시작한 책임과 무게를 다치지 않으면서 삼켜내는 과정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초코볼은 달다. 너무 달아서 금방 질리고, 먹고 나면 혓바닥까지 들큰해지고 만다. 달콤함이란 늘 그렇게 부담을 동반한다.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하면서도 끝내 마음 한쪽에서는 '지금 이 달콤함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를 걱정한다. 관계에서도 그렇고, 일에서도 그렇고, 사랑에서도 그렇다. 달다는 말 안에는 언제나 '금방 녹아버릴 수도 있다'는 조건이 숨어 있다. 그러니 늘 조금 급하게, 조금 조심스럽게, 그리고 조금 아프게 살아간다.
달아서 자주 먹지 못한다는 말은 사실 맛의 문제라기 보다는 지갑의 사정을 먼저 떠올려야 하는 삶의 현실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자주 누릴 수 없는 구조, 먹고 싶은 것을 먹기 전에 계산을 먼저 떠올리는 상황, 기쁨을 누릴 때조차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는 불안. 그래서 나는 종종 내 삶이 초코볼처럼 달기만 하다기 보다, 녹아내리기 쉬운 모양이라고 느낀다. 아주 작은 열에도 금방 녹아버리고, 쥐고 있다 보면 손은 이미 더러워져 있다.
아몬드를 깨물었을 때 잇몸에 느껴지는 통증은 항상 갑작스럽다. 좋아서 물었는데 아프다. 원해서 선택했는데 다친다. 이 아이러니가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을 좋아하다가 상처받고, 꿈을 꾸었다가 현실의 각진 부분이 잇몸을 찌르고, 기대했던 일에서 오히려 뜻밖의 통증이 차오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뱉어낼 수는 없다. 상처가 난 입안으로 또 다른 아몬드를 넣어야만 하는 경우들이 이어진다. 어쩌면 살아가는 일은 고통을 피하는 일이 아니라, 고통이 나를 지나갈 때 흔들리지 않고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는 일인지도 모른다.
초코볼을 먹다 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이 작은 하나에도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데, 인생은 얼마나 더 세밀해야 하는 걸까."
삶은 언제나 손을 더럽히고, 혓바닥을 들큰하게 하고, 때로는 잇몸을 찌른다. 그러면서도 항상 그 단맛 하나 때문에 다시 손을 뻗는다. 그 짧고 확실한 단맛이 없었다면 아마 누구도 오늘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사람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찾아낸 달콤함 덕분에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초코볼을 다 먹고 난 뒤, 손가락 끝에 묻은 초콜릿을 바라보는 순간이 있다. 깨끗이 닦아내면 흔적은 아무것도 남지 않지만, 그대로 두면 금방 시커멓게 지저분해진다. 삶의 흔적도 매한가지다. 지나간 일들은 다시 닦아내지 않으면 더러움이 되고, 너무 빨리 지워버리면 기억조차 남지 않는다. 그래서 적당히 지우고, 적당히 남기고, 적당히 잊으며 살아간다. 모든 흔적을 껴안고 살아갈 수 없고, 모든 상처를 완전히 지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초코볼 하나를 손에 쥐었다. 지갑을 열기 전에 머릿속으로 내일을 계산부터 해야 하는 삶이 버겁지만, 그 단맛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인생도, 초콜릿도 결국 같은 방식으로 나에게 속삭인다.
"달아서 아프고, 아파서 소중하고, 소중해서 견딜 수 있다."
삶은 초콜릿 상자 같은 우아한 선택지가 아니라, 손 위에서 녹아버리는 초콜릿 알맹이를 다치지 않게, 흘리지 않게, 그리고 너무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늦지 않게 먹어내야 하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코볼을 깨문다. 야무지고, 똑똑하게.
초코볼은 달고 아프고 짧게 스쳐 지나간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한 입이 또다시 나를 살게 한다는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