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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열제, 진통제, 파스 : 주말이라는 병원

by 해이


주말은 원래 사람들에게 숨을 좀 쉬라고 열어준 창문 같은 시간이다. 하지만 나에게 주말은 그저 평일의 연장선상에 불과하다. 저번주 일요일, 그러니까 11월의 마지막 날은 아침부터 몸이 뜨거웠다. 감기 기운인가 싶었는데, 열만 오른 게 아니라 머리가 핑 돌고,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몸이 이렇게 경고등을 켜는 날은 대부분 평일의 피로가 주말에야 뒤늦게 올라오는 날이다. 그동안 버티느라 눈치도 못 챘던 긴장과 피곤이 한꺼번에 신고식을 하듯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나는 해열제를 꺼냈다. 약을 목구멍 뒤로 넘길 때는 늘 비슷한 생각이 든다.

'아, 내가 별로 괜찮지 않았구나.'

평소엔 그냥 살다가, 약을 먹는 그 짧은 순간에야 비로소 내 몸의 상태를 인정하게 된다. 괜찮지 않은 걸 괜찮다고 우기며 살아온 시간이 얼마나 많았는지, 나는 매번 뒤늦게야 깨닫고 만다.


해열제를 먹고 이불속에 누워 있으니, 갑자기 마음까지 멍해지는 듯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덩달아 심란해지는 것 같다. 내가 아픈 이유는 '몸살'만이 아니라 '감정살' 같은 것들이 아니었을까. 평일에 차곡차곡 쌓아둔 피로, 억지로 무시한 서운함, 말을 아껴서 쌓인 답답함, 자꾸 미루던 감정의 잔해물들.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면, 마음 밑바닥에 있던 것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든다. 그래서 열이 나는 날은 꼭 감정도 얼기설기 엉켜있기 마련이다. 내가 정리하지 않은 감정들은 열보다 더 오래도록 나를 괴롭힌다.


열이 조금씩 내려가자 신기하게 몸의 통증들은 함께 가라앉기 시작했다. 몸은 단순하다. 열이 지배하는 동안엔 통증이 강해지고, 열이 빠져나가면 통증도 함께 잦아든다. 몸이 뜨겁고 아플 때는 그것 자체로 벅차지만, 식고 나면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마음은 정반대다. 감정의 열기가 식어야만 비로소 그 밑에 가라앉아 있던 진짜 통증이 모습을 드러낸다. 몸의 통증은 열과 함께 사라지지만, 마음의 통증은 열이 내려가야 보인다. 그래서 나는 열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야, 그동안 밀어두었던 감정살의 정체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누워 있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일엔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을 먼저 처리하고, 나에게 필요한 건 늘 뒤로 미뤄둔다. 해열제보다 부업이 먼저고, 식은땀보다 마감이 먼저고, 어지러움보다 책임감이 먼저였던 날들. 그러다 주말이 오면, 그제야 몸이 성을 내고 만다.


그렇지만 사람 마음이란 참 희한한 게, 몸이 아프면 오히려 무언가를 빨리 시작하고 싶은 욕심도 난다. 아프면서도 '이 시간에 글을 쓸까, 밀린 원고를 다듬어볼까, 아이디어를 좀 정리할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픈 날의 주말은 쓸데없을만치 생각이 더 많아진다. 멍해지기도 하고, 괜스레 서러워지기도 하고, 나를 조금 돌보고 싶어진다. 내가 아무리 튼튼한 척 해도 몸은 늘 솔직하고, 마음 또한 열이 나고, 결국 나는 이 둘에게 순서대로 항복하게 된다.


평소의 나는 몸살이 와도 일단 버티고, 열이 나도 '조금만 참으면 내려가겠지' 하고 방치한다. 근데 인생을 그렇게 버티기만 해서 해결된 적은 별로 없었다. 결국 해열제를 먹어야 하고, 결국 누워야 하고, 결국 쉬어줘야 한다. 마음도 딱 그렇다. 열까지 내버려 둘 때가 아니다. 뜨거워질 징조가 보이면, 빨리 식힐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열이 내려가니 몸은 조금 가벼워졌다. 그러자 이번엔 몸이 아니라 마음의 통증이 느껴졌다. 그동안 무시해 온 말들,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상처들, 나도 모르게 넘겨버린 서운함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몸의 열이 가리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다.


이때 필요한 건 해열제가 아니라 진통제 같은 시간이다. 상처를 즉시 고치는 힘은 없지만, 흔들리지 않고 감당할 수 있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시간. 나에게 진통제는 억지로 버티는 용기가 아니라, '아프다는 걸 인정하는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통증이 잦아들어도 남는 게 있었다. 어디가 아픈지도 모를 만큼 은근한 뻐근함.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고개를 드는 감정의 통증. 이건 진통제로는 안 된다. 여기엔 파스 같은 꾸준함이 필요하다. 붙였다 떼고, 다시 붙였다 떼며 천천히 굳은 마음을 풀어내는 과정.


파스는 한 번의 통증을 없애주지 않는다. 대신 앞으로 살아갈 힘을 조금 남겨준다.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한 번의 결심으로 바뀌지 않고, 반복되는 작은 돌봄들이 우리를 다시 움직이게 한다.


나는 이번 주말에 종일 누워 있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지쳐야만 쉬는 사람이었구나. 몸을 눕혀야만 마음도 눕는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이 단순한 사실을, 열이 나서야 인정하는 사람이었구나.'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해열제 한 알이 몸을 식히듯, 쉬는 몇 시간 동안 마음도 가라앉힌다는 거다. 열이 떨어지자 다시 밥 생각도 나고, 눈가에 매달려 있던 짜증 같은 감정도 조금씩 지워지고, '내일은 좀 괜찮겠지'하는 희미한 희망이 다시 올라왔다.


주말이 그렇게 지나갔다. 몸이 나한테 한 말, 마음이 가져온 말, 골치 아픈 뻐근함이 마지막으로 일러준 말. 그 사이에서 내가 겨우 알아들은 것은 "좀 살살 살아도 돼."


이번 주말의 열은 결국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멈춰야 할 때 멈추고, 쉬어야 할 때 쉬고, 해열제도 약이고, 진통제도 약이고, 무엇보다 '멈춤'이 가장 큰 약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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