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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한가운데서

[겨울+겨울]

by 해이


나는 거의 15년 가까이되는 시간 동안 낮잠을 자지 않았다. 낮잠은 늘 내 삶의 목록에 없었다. 시간이 남아야 가능한 일,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처럼 여겼다. 나에게 낮은 깨어 있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눈을 감고 몸을 눕히는 대신, 할 일을 하나라도 더 해야만 마음이 놓였다. 쉬는 날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주말은 더 바빴다. 아르바이트와 부업으로 하루를 꽉꽉 채우며, 쓸모없는 시간은 만들지 않겠다는 듯이 움직였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낮잠을 자지 않는 삶이 아니라, 낮잠이라는 개념 자체를 잊은 삶이 되었다.


몸이 피곤함을 축적하는 것 같아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피로는 늘 기본값이었고, 일상이었다. 낮에 잠을 잔다는 건 계획을 망가뜨리는 일이었고, 계획을 이행하지 못한 하루는 실패한 하루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낮잠을 자지 않았다. 눈을 붙이지 않았고, 붙일 필요도 없다고 믿었다. 그렇게 십수 년이 흘렀다.


그런 내가 정말 오랜만에 낮잠을 잤다. 정확히는 30분 남짓이었다. 잠깐 눈만 붙일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깊이 잠들었다. 눈을 감자마자 잠에 들었다. 깨지 않고 그대로 더 자고 싶다는 생각이 몸을 지배할 만큼, 잠은 달았다. 이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달까.


하지만 결국 일어났다. 알람을 맞춰 놓은 것도 아니지만, 나는 다시 몸을 세웠다. 미뤄둔 일은 없었다. 계획해 두었던 만큼의 부업을 그대로 소화했고, 하루의 일정은 어긋나지 않았다. 겉으로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하루였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마음 한편에 어떤 잔상이 남았다. 고작 30분이었는데, 그 잠이 내 시간을, 내 상태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요즘 나는 내 삶에서 기념할 만한 순간들을 연달아 지나고 있다. 여름에는 여러 작가들과 함께 쓴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을 출간했다.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함께 썼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오는 책이었다. 이어서 월간지 '샘터' 1월호에 한 편의 글이 실리게 되었고, '좋은생각' 2월호에도 또 다른 글 한 편이 게재되기로 했다. 여기에 더해 출판사로부터 먼저 연락을 받아, 내 글을 출간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고, 인터넷 신문인 오마이뉴스에는 일곱 편의 글이 게재되었다.


이 모든 일이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일어났다. 산업디자인과로 진학하며 자연스럽게 손에서 놓아버렸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 지 6개월. 긴 시간 글을 쓰지 않았던 사람이 다시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그 결심이 현실의 결과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짧다고 하면 짧은 시간들이었다.


이 일들을 겪으며 나는 '겨울잠'을 떠올렸다. 겨울 동안 땅속이나 굴 속에서 시간을 통과하다가, 계절이 바뀌면 다시 밖으로 나오는 동물들. 나 역시 그랬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15년 동안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일했고, 벌었고, 이겨내고 있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나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었고, 완전히 잊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 이름으로 살아가지는 않았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역할들이 너무 많았다. 우선순위에서 글쓰기는 늘 뒤로 밀렸다. '나중에,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이라는 말속에 깊게 파묻혀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글을 쓰지 않는 삶은 어느새 익숙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 다시 글을 쓰게 되었고, 그 결과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치 오랜 겨울을 지나 뒤늦게 몸을 일으킨 것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것을 또렷하게 자각하게 만든 건 고작 30분의 낮잠이었다. 겨울잠에 비하면 너무 짧은 시간이다. 내가 실제로 잔 잠은 겨우 30분이었고, 창밖의 계절은 여전히 겨울 한가운데에 있다. 하지만 그 잠은 분명한 속삭임이었다.

'이제는 잠에서 깨어나도 괜찮다, 다시 움직여도 된다, 그리고 더는 미루지 않아도 된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겨울 속을 살고 있다. 바쁜 하루하루 속에서, 해야 할 일들은 여전히 많다.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뀐 삶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더 이상 잠든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작가로서의 삶은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잠들어 있다가 조심스럽게 눈을 뜬 상태 정도인 것 같다.


낮잠은 짧았지만 충분했고, 겨울은 길었지만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나는 이제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것도 아니고, 다시 잠들어 있는 것도 아닌 상태. 그러나 분명한 건, 나는 다시 쓰고 있고, 다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작 30분이었지만, 그 낮잠은 내 삶의 계절을 다시 시작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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