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막과의 추억을 남길 모서리
저도 사진 찍는 일을 꽤 좋아하는데요, 어김없이 생각이 생각으로 이어지던 언젠가 우리는 왜 사진을 찍을까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유 끝에 저는 사라질 순간을 소유하고 싶어서 사진을 찍게 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시간의 흐름은 멈출 수 없고, 이 순간은 필연적으로 소멸할 텐데, 우리는 이를 너무나 잘 알아서 최대한 오래 붙잡고 싶은 거죠. 무형의 찰나는 손에 쥘 수 없으니 대신 유형의 사진에 장면을 가두는 겁니다. 은판에서 필름, 그리고 데이터로 형태가 변한 지금도요.
그래서 해일막걸리에서 시간을 보내시고 사진을 남기시는 분들께 감사했습니다. 함께한 순간이 오래 간직하고 싶을 만큼 의미 있었다는 뜻일 테니까요.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해일막걸리 안에 사진을 찍을 마땅한 장소가 없다는 거였어요. 매장 안은 탁자로 꽉 차 있고, 한쪽 벽은 양조장 때문에 세운 가벽이라 조명도 없었죠. 그나마 주방 뒷벽에 선반과 소품이 있어 좁은 통로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으시곤 했습니다.
포토 존이 필요했어요. 해일막걸리와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요. 하지만 개업 후 3개월이 다 지나도록 시작도 못하고 미뤄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행운이 찾아왔죠. 작년 가을에 신청한 관악구 아트테리어 지원 사업에 선정되었거든요. 영업한 지 오래되지 않아 반신반의하며 결과를 기다렸는데 다행히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어요.
원래는 매장 내부 포토 존을 비롯해서 외부 익스테리어, 공간 경험 디자인, 명함과 쇼핑백 제작까지 욕심을 냈는데, 함께 사업을 진행할 예술 작가님과 회의 후에 내부 포토 존과 명함, 쇼핑백 제작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예쁜 포토 존이 좋지만 저는 기획에 맥락을 담고 싶었어요. 포토 존을 꾸릴 모서리를 노려 보다가 번뜩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셀프 인테리어로 진행한 매장 내부는 한옥의 요소를 따왔어요. 그래서 매장이 하나의 가옥이라고 생각한다면, 포토 존은 연못이 있는 원정 콘셉트가 좋을 것 같았죠. 궁이나 고택에 놀러 가면 보게 되는 정자를 품은 못과 뜰처럼요.
그래서 호수의 수면을 형상화한 거울을 중심으로 수풀 화분을 두고, 정갈한 분위기의 조명과 물건으로 주변을 장식하기로 했습니다. 기성품으로 공간을 채울 수도 있었지만 사업 특성상 맞춤 디자인이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근 목공방에서 장식장을 별도로 제작했습니다.
함께한 작가님께서 레퍼런스와 도안을 꼼꼼히 준비해 주셔서 수월하게 의뢰할 수 있었어요. 물결 모양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주되 양조장 창문을 가리지 않도록 높낮이를 다르게 맞췄습니다. 색은 우드 스테인을 칠해 최대한 어둡게 진행했어요. 아무래도 지금 해일막걸리에 있는 목재들이 다 어두운 편이라서요.
소품도 제작했는데요, 수업 후 버려지는 흙을 모아 재활용하는 도자 공방이 있어서 그곳에서 리사이클 술잔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잔 디자인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을 찾아봤어요. 국화 모양 잔, 굽다리 잔, 육각 잔 등 다양한 형태의 잔이 있더라고요. 다 너무 예뻤지만 직선 가구가 많은 해일막걸리와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사다리꼴 모양의 작은 잔 여러 개를 주문했어요.
이후 조명도 고르고, 겨울을 잘 견딜 수 있는 식물들도 고르다 보니 훌쩍 해가 지나갔습니다. 지난주부터 주문한 물건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는데요. 물건들이 도착하면 바로 제 자리를 찾아 배치를 해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포토 존이 빠르게 풍성해졌어요. 본가에서 온 작은 옹기들도 두고 보니, 글을 쓰는 지금은 90% 정도 완성된 것 같습니다. 출근해서 조명의 불을 켜두면 전체적인 분위기가 화사해져서 아주 만족하고 있답니다.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저만의 속도로 공간을 가꾸다 보니 천천히, 조금씩, 하지만 충분하게 식구들을 들이고 있습니다. 한 번에 짠하고 완성되는 완벽함은 아니지만 꾸준히 성장하는 해막을 보며 보람을 느껴요. 부디 방문하시는 분들께도 같은 마음이 전달되면 좋겠습니다.
해일막걸리에 방문하실 예정이신가요? 그렇다면 막걸리를 담으신 후, 손수 꾸민 해막의 작은 뜨락에서 그날 하루를 간직해 보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