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동네친구가 한 명쯤 있으면 좋겠다.
잠이 덜 깬 눈을 함께 부비며 성곽길을 걷다가
출출해지면 왕돈까스를 쓱싹 포장해 와룡공원 벤치에서 함께 먹고 내려오는 길에
카페 '일상'에 들러 오늘의 커피를 마시고
창경궁까지 걸어가면 참 좋겠다.
또 어떤 날에는 나폴레옹에서 단팥빵과 초코빵을 사들고
심우장과 감사원 길을 지나 삼청동까지(조금 더 힘이 난다면 창의문을 거쳐 부암동까지) 걷고 내려와
수연산방에서 시원한 미숫가루와 인절미를 나누어 먹으면 참 좋겠다.
헛헛한 어느 저녁에는 기사식당에 들러 돼지불백을 먹고
바로 옆 작은 슈퍼에서 초코우유를 사 마시며 낙산공원을 오르거나
원남동, 계동까지 느릿느릿 걸은 뒤 영화 한 편을 보고 돌아오면 참 좋겠다.
부러 약속을 잡지 않아도 그저 발길 닿는 가까운 곳에 사는 동네를 함께 나눌 친구가 있었으면 참 좋겠다.
*팔월
마음만 먹으면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나를 견디게도, 견디지 못하게도 한다고.
내 이야기가 아니라면 아니어서
내 이야기가 맞으면 맞아서
나는 이럴 때 마다 잘 견뎌온 시간들이 무색하게
네 목소리라는, 네 이야기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아무리.멀리. 지나 왔어도.
아프고 좋았던, 미워하고 사랑했던, 불안하고 안도했던 기억들이
순식간에 밀려왔다가 몇 개는 머물고 몇 개는 흘러가버렸어.
이 짧은 순간 몇 구절의 노래에.
*시월
한 장 한 장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오래오래 가을빛 속에 몸을 숨기고 싶은날들.
*사월
한참을 애써도 결국 누군가에겐 순간이고,
누군가에겐 영원이 되는 어떤 날들.
*칠월
골목을 돌면 새로운 세상이 아무렇지않게 나타나
툭-
내 어깨를 토닥이며 무심하게
'어,왔어?'하고 말해주면 좋겠다.
*삼월
이 곳에 서서 나에 대해 생각하던 시간을 오래오래 잊지 않으려고
사진기를 들고 버튼을 꾸욱-누르던 그 순간이,
그때의 내 뒷모습이,
다시 보고 싶어 지는 어느 날.
*유월
바람이 들려와
그날의 우리를 기억하는 그 노래로
그날의 네 목소리를 꼭 안고선 내게로. 난 너를 기다려.
한 순간 네 손을 놓쳐버린, 빛을 잃은 나
깜깜한 매일을 닫아걸며 몇 번이나 되뇌는건
그 날로 돌아가 그저 하루만 함께 더걷고 싶어. 오늘로 오지 않게.
네게로 달려가
내 손을 내 마음을 놓았던 그 날을 뒤로하고
너를 생각해
그때의 네 목소리가 바람이 되어 내게와 닿으면 난 너를 기다려
스치는 곳곳 내게는 사랑인 찰나의 순간,
잡히지 않는 기억들로 내 마음을 토닥여
시간은 내 걸음보다 빠르고 나는 숨이차 이곳에 멈춰서 널 맴돌아
바람이 들려와
그날의 우리를 기억하는 그 노래로.
바람이 들려와
그날의 네 목소리를 꼭 안고서 내게로. 난 너를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