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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gminghaen Oct 27. 2024

#6.정독도서관

일상으로의 초대

어려운 매일을 쉽게 사는 척하느라 힘든 요즘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곁에 있는 너무도 낯선 내 자신 때문에.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살아있다는 것이 두려운 날들이었다. 


서둘러 시간을 따라가느라 놓친 것들이 많았다. 

거울 속 내 모습이 처음 보는 듯 느껴져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시간들이 쌓이자, 

나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낯설었다. 

진짜 나는 한참 뒤에 버려 둔 채 

나는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 조차도 나를 몰라 두려운 날들이었다. 


서러웠다. 

종일 무뚝뚝한 얼굴로 날을 세운 채 기계적으로 말을 하고 인사를 던지고 

무신경하고 무덤덤한 척 하루를 버텼다. 아니, 버렸다.

그런 내가 너무 싫어서 자꾸 흐르는 눈물이 두려운 날들이었다. 


이토록 두려운 매일을 아슬아슬 외줄타기를 하듯 위태롭게 건너던 오월 어느 아침.

풀 내음을 안은 채 내게 다가오는 눈부신 햇살이 어쩐지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듯 어색해 부러 얼굴을 더 찡그리다 문득, 

그 순간 내게 떠오른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찬 내 삶 속 일상의 조각들이었다.

등나무 옆 도서관에서 진한 노란 빛의 오후 햇살을 등지고 살포시 쌓인 먼지를 

걷어내 책을 골라 나오며 밟았던 나무계단의 삐걱 거리는 소리.

운동회가 끝난 후 흙이 잔뜩 묻은 손에 공책과 연필을 들고, 

모래 가득한 운동화를 탈탈 털며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일요일 오후의 

장난기 가득한 소란스러움과 벅찬 나른함.

냉동실에 꽁꽁 얼린 오예스를 또각또각 소리 내며 아홉조각으로 잘라 

초콜릿이 가장 많은 네 귀퉁이의 조각을 동생과 나눠 먹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던 

평범한 어느 저녁.

손가락에 봉숭아를 올리고 실로 동동 묶은 뒤 하룻밤을 내내 기다리다 잠에서 

깨자마자 빠알간 물이 든 손가락을 보고 또 보던 날.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밤눈이 어두운 내가 계단을 잘 내려갈 수 있도록 나를 꼭 

잡아주던 친구들의 작지만 든든한 손.

내가 묶는 것보다 늘 몇 배는 더 예쁜 엄마가 묶어주는 원피스의 리본.

낯선 여행지에서 지친 발과, 어쩌면 더 지친 마음을 쉬게 해준 작은 성당에 흐르던 

성가의 선율과 나를 가만가만 어루만져주는 것처럼 천천히 흔들리던 촛불들.

오랜 단골 빵집에서 좋아하는 초코빵을 하나 사 입에 물고 

해가 느릿느릿 지는 여름저녁을 걸으며 만난 분홍 빛 노을.

가디건의 소매를 걷지 않아도 되는 가을밤.

오랜 친구와 함께 걸으며 나눈 힘이 되는 이야기들.

밤하늘의 달이 너무 동그랗고 예뻐 한참을 바라보던 내 뒷모습.

창경궁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들으면 소란스럽고 복잡한 일들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독이며 위로가 되어준 비의 소리.

눈 오던 날 덕수궁에 쌓이는 눈을 바라보며 마시는 율무차의 다정한 달콤함.

아무도 없는 극장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혼자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이른 아침. 

서늘한 저녁 바람을 피해 한 사람 두 사람 옹기종기 모여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고, 

달콤한 호떡과 뜨근한 어묵을 호호 불던 포장마차.

보드라운 이불로 몸을 칭칭 감고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빗소리와 함께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듣는 깊은 새벽.

두서없이 늘어놓는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기분 좋음을 

선물해주는 오랜 친구의 다정함과 미소.

마음을 놓아도 되는 시간에, 마음을 놓아도 되는 사람들과 함께 마시는 차 한잔.

아무도 날 모르는 곳에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나무를, 구름을 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게 해주었던 여행의 순간.

그리고…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나…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다른 사람은 무엇을 할까?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건 무엇일까?를 생각하던 내가 

정말로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 

내 것이었던 소중한 순간들을 모두 꺼내 놓을 수 있었다. 

많은 곳에, 많은 시간들에

내가 지나온 흔적이, 묻어둔 기억이, 숨겨놓은 보석 같은 순간들이 

아직도 잘 있다는 사실에 

어쩐지 마음이 서운했던 지금, 이리도 큰 위로를 받는다.

내게도 반짝이는 순간이, 따뜻했던 시간이 있었음을 잊고 있었다.

어느새 내 머리맡에 와 반짝반짝 빛나는 햇빛을 이제는 마음껏 마주 보며 

故신해철의 노래 ‘일상으로의 초대’를 흥얼거린다.

‘모든 시간 모든 곳에서 난 널 느껴, 

내 게로 와 줘 내 생활 속으로 너와 같이 함께 라면 모든 게 새로울 거야.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너와 같이 함께 라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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