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 원서동
그러니까 어떤 날에는 시선이 닿은 어딘가에 희미하게 켜져 있는 불빛에 찰나의 위로를 받기도 한다니까-
*구월, 무교동
꼭 그때와 같은 곳이 아니어도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무언가를
마주하게 될 때가 있잖아요.
바람이 적당하던 시월의 어느 저녁 보스톤의 허름한 피자집.
그때의 바람, 그때의 공기 냄새, 그때의 네 손의 촉감
그때의, 내 사랑.
예쁘고 아련하게 포장하고 싶지 않아.
되는 대로 그날에 대해 마구마구 말해버리고 싶더라구요
그럴 때에는, 난.
*구월, 중학동
한 장의 위로_
*시월, 창경궁
문득 쓸쓸하고 ㅡ,자주 서러워 ㅡ,덜컥 겁이 나는 가을의 시작.
너무 애쓰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애쓰는 것 밖에 할 수 있는게 없는 듯 해 낙엽처럼 흩어지는 마음들을 겨우겨우 잡아 올리면-
바람 한번에,구름 한번에, 이모든 것,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툭 하고
내게서 다시 떨어지게 만드는, 그런 가을
*시월, 종묘
하루하루-가 두렵지 않은 날들 속에 살아있다는 건 어떤 느낌이야?
*시월, 원남동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무언가를 소외시키는 것에 예민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람만이 아니라 물건에게도.
예를 들어 , 설거지를 하며 선입선출법을 적용하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 막 사용해서 설거지를 마친 그릇을
사용하지 않아 식기건조대에 놓여있던 그릇 위, 혹은 앞에 바로 놓는 것이 아니라,
아직 사용하지 않은 그릇을 들어 살짝 빼놓은 뒤
지금 막 씻은 그릇을 맨 아래에, 혹은 맨 뒤에 놓고
마지막에 사용하지 않은 그릇을 맨 위에 놓는 거다.
왜냐하면,
그릇들은 기다렸으니까. 다음 번에는 이번에 사용하지 않은 그릇이 사용되어야 하니까.
그래야 공평하니까.
하나 더,
책 100권을 어딘가로 보내기 위해 100권이 맞는지 세어볼 때,
대부분 2,4,6,8-, 5,10,15-, 이렇게 세기 편한 방법으로 물건을 센다면
나는 1,3,4,8,10,14,17,23-이렇게 규칙 없이 세는 거다.
왜냐하면,
매번 2,4,6,8만, 5,10,15만 불리는 건 불공평하니까. 다른 숫자들이 서운하니까.
나는 언제부터 무언가를 소외시키는 것, 소외당한다는 것에 이렇게 마음을 쓰게 된걸까
창경궁을 향해 걷던 길 위에서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려면 얼마나 걸릴지 초를 세어보다
오랜만에 34라는 숫자를 입 밖으로 꺼내 낯설음과 반가움에 미안함을 느끼던 어느 날 부터 였을까?
아니면,
네가 나를 그냥 지나친 길 위에 혼자 남겨진 내 이름을 주워
내가 나에게 불러주던
그 날 부터였을까?
*십일월.종묘
늦가을의 해가 눈 앞에서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보며
종묘 한 복판에서 나는 생각했다. 두렵다고.
살아내고 있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이 아주 많이 두렵다고.
지는 해를 잡아봐도 되는지 아무에게라도 묻고 싶은 날이었지.
*십이월,통의동
어떻게,너는 여기에 이렇게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