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겨울이 한창인,
서늘하면서도 한낮에는 햇빛이 진하게 온 몸을 감싸는 날이었다.
그 날의 난,
지금까지도 즐겨 입는 먹색코트-보송보송한 털모자가 달려있고, 지퍼가 있지만 귀찮아서 똑딱이 단추만으로 입고 벗어 바람이 슝슝 들어오는-를 입고 있었다.
십이월 초, 저녁 여섯 시 즈음 우린 광화문에서 만났고
세종문화회관 뒤편에서 돈가스와 우동을 먹었다.
눈이 온다는 소식은 있었지만, 아직 눈이 오지 않았고
우린 눈을 맞고 싶었기에 눈이 올 때까지 교보문고를 구경하기로 했다.
한 시간 남짓, 각자 읽고 싶은 책을 각각 다른 장소에서 읽었고
중간중간 멀리서 서로가 어딘가에 있음을 눈짓으로 확인했다.
나는 서로의 책에 편지를 써주자는 그 사람의 익숙한 목소리를 쫑긋 세워 귀에 꼭꼭 담으며 교보문고를 나와 무교동으로 걸었다.
나는 코트의 단추를 하나도 잠그지 않고 코트 자락을 바람에 날리며 걷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내 눈과 귀를 스쳐 온몸을 흔들었다.
옆에서 걷던 그 사람은 휘청-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멈추어 섰다.
그 사람의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 오른손에 쥐어 주고 무릎을 굽혀 앉은 뒤
손가락으로 내 코트의 미끄러운 지퍼를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나는 가만히 내 코트 끝자락의 지퍼가 흔들리는 걸 바라보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그 사람은 내 코트의 지퍼를 끝까지 채운 다음 목 부분의 똑딱이 단추를 딸깍 하고 닫으며 단단히 여며주었다.
뿌듯해하는 그 사람의 눈이 내 얼굴을 스쳐 내 귀에 닿았다.
그때.
눈이 내렸다.
또 그때.
눈송이 몇 움큼이 그 사람의 손을 따라 내 귓속으로 들어왔다.
차가운 눈송이와 따스한 손의 감촉이 내 귓속을 빙빙 휘감아 둥둥 울렸다.
난 알았다.
내가 이 장면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되리라는 걸.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겨울날,
히터를 틀어 놓은 버스 안, 서리가 낀 창문에 귓불이 닿을 때.
둘둘 휘감은 목도리 속으로 눈송이 몇 알이 파고들어 귓가에 닿을 때.
그럴 때마다
문득 내 귀를 두 손으로 감싸 쥐게 하는,
내게는 오래오래 없어지지 않을 기억을 결국, 만들어버리고 말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