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보다 아팠던 말 한마디
이런 날이 계속된다. 여느 때처럼...
점심을 먹고 창구에 앉아 있으면 졸음이 쏟아진다. 옆자리에는 세 살 많은 과장님이, 반대편은 동갑내기지만 선배인 대리님이 앉아 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누군가 먹다 남긴 종이컵이 보인다.
20대에는 대기업 마트에서 일했다. 퇴사하기 전까지는 팀의 중간 직급 정도의 역할을 했고, 아르바이트생을 거느리고 있어 쓰레기 줍는 일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막내다. 졸음도 깰 겸 종이컵을 집어 들고 남은 커피를 쏟기 위해 화장실로 갔다.
금고 직원은 다섯 명이다. 다들 말수가 적어 대화는 쉽사리 오가지 않는다. 손님을 상대하다 보니 말수를 아끼는 것일 수도 있다. '끼익' 소리와 함께 시골 금고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 중년 남성이 들어온다.
그는 점잖게 내 앞에 앉아 3,000만 원을 꺼내 놓으며 정기예탁금 금리에 대해 묻는다. 이때까지 면 단위 금고의 하루는 평온했다.
내가 근무할 때 만19세 이상 출자회원이면 3,000만 원 한도로 1.4% 농어촌특별세만 내는 세금우대 혜택이 있었다. 그리고 65세 이상이면 5,000만 원 한도로 비과세되는 상품이 있었다. 이걸 통틀어 '세금우대' 한도가 얼마 남았다고 표현했다.
그날도 그랬다.
"아버님 조회해 보니 65세 이상이셔서 세금우대 한도가 8,000만 원 남아 있네요? 세금우대 처리 해드리면 될까요?"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그렇게 점잔 빼던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대답 없이 가만있길래 나도 가만히 있는다.
적막이 흐른다.
중년의 남성은 한참을 노려보다 말한다.
"내가 8,000만 원이 있다고?"
차분히 설명한다.
"아니요. 한도가 8,000만 원 남아있단 소리입니다."
그가 목소리를 높인다.
"그걸 왜 말하는데 없는 돈을 왜 말하는데?"
"이 새끼야, 네가 줄 거야, 그 돈? 네가 줄 거냐고"
욕이 붙어 있었다. 장점인지 단점인지 이럴 때는 오히려 더 차분해진다.
"그렇게 말씀드린 적 없고요, 정기예탁금 가입하려면 세금 부분을 선택해야 돼서 그쪽에게 여쭤본 겁니다."
"제 맘대로 할 수도 없고 그쪽이 정하는 거예요."
중간중간 '그쪽'이란 단어로 나름의 공격을 한다.
하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한참을 실랑이하다가 상무님이 일어났다.
"아휴 형님 왜 그러니껴"(형님 왜 그러세요 사투리)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둘은 아는 사이다.
"저새끼 말하는 거 들었지 상무야!"
욕설은 계속된다.
"아휴 형님 우리 직원이 말을 조리 있게 못 한다. 담배나 한 대 피우시더!"
상무는 팔짱을 껴 2층으로 데려간다.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아마도 울었던 것 같다. 이제서야 옆 선배가 자기가 처리하겠다며 돈과 통장을 가지고 간다. 난 마음을 다쳤다.
한참을 2층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때 복식 호흡법을 알았다면 좀 더 빨리 마음이 차분해질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20분이 지나서야 둘은 내려왔고 상무님은 내 뒤에서 말했다.
"방금 일 사과드려."
너무도 어이없었지만 반항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제가 말실수 했나 봅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봅니다'란 단어로 지켜본다.
그는 눈을 흘기며 "이번만 참는 거야!" 하며 자신의 돈과 통장을 찾아 옆자리로 이동한다.
그가 자리를 뜰때까지 정관을 읽었다. 호흡은 100m 달리기를 끝낸 사람처럼 불안정했고, 행여 그쪽으로 눈이 마주칠까 더욱 집중해서 읽었다.
모든 업무가 끝나고 그가 자리를 뜨자 상무가 말했다.
오래전 이곳을 떠나 사업을 하는 사람이란다. 어릴 적엔 자신과 형, 동생사이었는데 오랜만에 봐서 처음엔 몰라 봤다고.
그 사람이 미웠다. 상무는 더 미웠다. 이런 곳에 근무하고 있는 내가 가장 미웠다. 퇴근할 때쯤 과장님이 담배를 건네며 토닥여준다. 끊었던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리고 그날 저녁 퇴사를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