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어학연수 제3장 #10 임디나(2) 유적지로 가득한 라바트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 10 임디나(2)
'왕좌의 게임' 촬영지인 임디나는 귀족이 살던 곳인데요. 그렇다면 평민들은 어디에서 살았을까요? 평민들이 살았던 곳은 임디나에서 맞은 편의 '라바트'라는 곳입니다. 라바트에는 중요한 볼거리가 몇 가지 있는데요. 가장 중요한 곳은 성바울이 몰타에 난파했을 때 지냈던 동굴이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로마 문화, 아랍문화 등이 혼재되어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라바트입니다.
구글에서 '라바트(Rabat)'를 검색하면 모로코의 수도로 나온다. 몰타에서 모로코와 지명이 같은 곳이 있다고 놀라기는 아직 이르다. 몰타는 '몰타어'와 '영어'를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몰타어는 상당 부분 아랍어와 비슷하다. 몰타가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페니키아, 로마 이후에 몰타를 지배한 건 이슬람이었고 아랍어는 몰타어에 상당부분 영향을 끼쳤다. 몰타가 유럽에 있지만 아랍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기도 하다.
'왕좌의 게임'에 등장한 성곽 안의 마을이 임디나(Mdina)이고 임디나 게이트 건너편에 있는 마을, 즉 성 외곽이 '라바트'다. '라바트'라는 이름은 '교외'를 뜻하는 아랍어다. 임디나는 로마 때까지는 임디나는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살던 하나의 지역이었고 라바트는 지금보다 3배나 될 정도로 큰 도시였다. 하지만 이슬람이 몰타를 지배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도시가 크면 적의 공격에 쉽게 노출되고 방어가 어렵다고 생각한 아랍인들이 성을 쌓았고 자연스레 성을 기준으로 지역이 두 개로 나뉘게 된 것이다. 성 안쪽인 임디나는 귀족들이, 성 밖은 라바트는 평민들이 살았다.
이곳의 이름도 처음부터 임디나는 아니었다. 가장 처음 정착했던 페니키아 인들은 말레트로 불렀고 로마인들이 멜리테(Melite)로 이름을 변경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지명 '멜리데'가 바로 여기다. 이후 이슬람이 몰타를 지배하면서 아랍어인 '메디나'에서 이름 따와 임디나로 바꾸었고 이 지역을 수도로 정하니 외곽지역은 자연스레 라바트가 됐다.
임디나는 오래된 중세도시가 가진 고풍스러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라 몰타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발레타와 함께 꼭 방문하는 도시다. 하지만 길을 건너 임디나의 외곽지역인 라바트는 관광객들은 크게 주목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저 골목이나 걷는 정도에서 그친다고나 할까. 하지만, 라바트에는 꼭 봐야 할 중요한 볼거리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성 바울이 포교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동굴인 성바울 유적지(St Paul's Church and Grotto)와 로마시대의 매장문화를 볼 수 있는 '카타콤(Catacombs)'이다.
성바울 유적지를 보려면 위냐코트 박물관(The Wignacourt Museum)으로 가야한다. 임디나 맞은 편 골목으로 들어서면 라바트인데 몰티즈(몰타 사람들)가 살고 있는 주택가이다. 임디나가 사람이 떠나고 조용해진 '사일런트 시티'라는 별명이 있지만 지금은 늘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라바트로 건너오는 순간 적막감이 달려든다. 사람들도 거의 없다. 라바트야 말로 진정한 사일런트 시티다. 라바트의 골목 역시 몰타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흔한 골목인데 이곳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건 색색깔의 테라스다. 창문만 돌출되게 만든 테라스는 몰타가 아랍의 영향을 받았다는 대표적인 증거다. 몰타 특유의 라임스톤에 총 천연색의 테라스는 몰타를 가장 대표하는 이미지기도 하다.
골목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오면 라바트 중앙에 성바울 성당과 광장이 있고 그 오른쪽에 위냐코트 박물관이 있다. 이 성당의 정식이름은 'Kolleġġjata Bażilika u Proto-Parroċċa ta' San Pawl, Rabat - Malta'인데 어떻게 읽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임디나의 성바울 성당과 구별하기 위해 라바트의 성바울 대성당으로 부르는 것 같았다. 라바트의 성 바울 성당은 지붕 위에 십자가가 세 개나 있는 바실리카 성당으로 몰타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 중 한 곳이다. 이 성당 바로 에 성 바울이 서기 60년에 몰타에 3개월 동안 머물렀던 동굴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가 있는 것과 달리 중세의 바로크 풍인 이유는 이곳 역시 시칠리아 대지진으로 원래 있던 건물은 모두 무너졌고 1653년에 재건된 교회라서 그렇다. 몰타 바로크 건축의 대가로 불리는 몰타 출신의 건축가인 '로렌초 가파(Lorenzo Gafa)'의 작품이다.
몰타에서 지내는 동안 라바트를 여러 번 왔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부활절 행사였다. 어학원에서 액티비티로 투어가 있었는데 마침 부활절이었고 라바트가 가장 첫 일정이었다. 부활절 미사 후 라바트 곳곳을 행진하는 부활절 행사를 보게 된 것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성당이 라바트의 가장 중심에 있는 곳이라 이 주변으로 다양한 식당과 맛집들이 즐비한 곳이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 몰타 편'에 소개된 파루찬(Parruccan)이라는 전통과자점도 이 성당 바로 근처에 있다.
몰타 부활절 풍경이 더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haekyoung/99
성 바울이 머물렀던 동굴은 성당이 아닌 옆에 있는 위냐코트 박물관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었다. 위냐코트 박물관은 총 3개의 층으로 지하는 성바울의 동굴과 2차 세계대전 때 사용했던 대피소, 그리고 성바울의 카타콤이 있고 1층과 2층은 전시관인데 다양한 예술품과 당시 성직자들의 생활했던 생활상을 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참고로 '위냐코트'는 프랑스 출신의 몰타기사단 단장(1601~1622)이다. 위냐코트 박물관 입장료만으로 중요한 볼거리를 모두 볼 수 있어 가성비로는 최고의 볼거리다.
기독교에서 '바울'은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예수가 없었으면 예수 믿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요, 바울이 없었다면 세계 기독교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신학자가 있을 정도다. 몰타 역시 사도 바울의 포교로 가톨릭이 시작됐고 그 내용은 '사도행전 28장 1절 :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에 그대로 적혀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면 몰타 최초의 주교인 성 푸불리우스 예배당과 사도 바올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예배당 메인 제단은 몰타 기사단이 헌정한 예배당이라서 몰타 십자가를 들고 있는 아기 예수를 그려 넣었다. 발레타가 어딜 가나 성요한 기사단과 성 요한을 만나는 도시라면 임디나는 성 바울과 성 푸불리우스를 만날 수 있는 도시다.
성바울의 동굴을 보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성 바울(St Paul)이 서기 60년에 몰타에 도착했을 때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역사적인 장소다. 때는 로마 시대로 성 바울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앞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크레타 섬에서 로마로 압송되던 중 파도로 인해 몰타에서 난파된다. 그는 이 동굴에서 3개월 동안 머물면서 기독교를 전파하게 되는데 가장 먼저 개종한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몰타의 총독이던 푸불리우스다. 사도 바울의 기도로 죽을 병에 걸렸던 푸불리우스의 아버지가 낫게 되니 가장 먼저 기독교로 개종하며 몰타 최초의 주교가 된다. 몰타의 가톨릭 역사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가 가톨릭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AD 60년에 있었던 장소를 눈앞에서 확인하는 순간은 특별하다. 가톨릭 신자라면 이곳은 더욱 남다른 곳이겠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개방된 공간이었는데 관람객이 성 바울 동상을 파손하는 일이 벌어져 현재는 철장으로 가려져 있지만 관람하는데 큰 지장은 없다. 수천 년이 지났는데도 기독교 박해를 위해 동굴 천장에 쇠사슬을 달아서 고문하던 흔적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다.
가톨릭의 성지인만큼 몰타를 방문하는 역대 교황님들은 무조건 이 동굴을 방문하는 곳이다. 2001년에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2010년에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현재 교황님인 프란치스코 교황도 작년에 이곳을 찾았다.
성 바울의 동굴과 관련된 이야기는 내년에 다큐멘터리로 만날 예정이다. CGN에서 최초의 선교사 '바울'의 사역과 일대기를 다룬 다큐 <바울로부터>를 제작 중이라고 한다. '바울'의 사역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인데 몰타 편에 이곳이 소개될 예정이다. 이 다큐는 배우 차인표 씨가 참여했다고 한다.
통상 카타콤이라고 하면 '지하무덤'보다는 '기독교의 박해를 피해 지하동굴을 파고 숨어서 예배를 드리던 곳'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몰타의 카타콤은 기독교 박해와는 관계없는 순수한 지하무덤이다. 로마의 풍습은 마을 안에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것이 위생적으로 좋지 않아 법으로 금지했기에 임디나의 외곽인 라바트에 묻었다. 그때 만든 카타콤이 지금도 여전히 라바트 땅 아래 존재한다. 그중 가장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는 곳은 '성바울의 카타콤(St Pauls Catacombs)'이다.
성바울의 카타콤은 규모가 상당한데 위냐코트 박물관 아래로도 입장이 가능하고 성바울 카타콤만 볼 경우 좀 더 안쪽으로 이동하면 별도의 매표소가 따로 있다. 위냐코트 박물관 아래에 있는 성바울 카타콤과 성바울 카타콤 매표소를 통해 볼 수 있는 성바울 카타콤은 같은 곳이지만 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두 곳의 카타콤을 모두 봤는데 어느 카타콤이든 모양새가 비슷해서 둘 중 한 군데만 봐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몰타의 카타콤은 서기 3세기에 만들어진 지하무덤인데 지금도 규모가 상당하니 당시로는 엄청났을 듯하다. 이층으로 나란히 파 놓은 무덤, 가족묘로 보이는 곳 등등 다양한 크기의 무덤들이다. 사람의 체형에 따라 크기가 전부 다른데 유독 작은 공간도 눈에 띈다. 어린아이들의 무덤이었다. 어떤 곳은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구불구불 미로 같은 길이 끝없이 연결되는데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 찾아갔을지 문득 궁금했다. 수많은 무덤이 있지만 여러 차례 도굴이 있었고 지진과 전쟁 등으로 인해 뼈 외에는 별다른 것이 발견되지 않은 점은 참으로 아쉬웠다.
수천 년이 지났음에도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고 있다는 점도 놀라웠다. 카타콤을 둘러보면 중앙에 큰 테이블이 눈에 띈다. '아가페 테이블(Agape Table)'이다. 장례 절차가 끝나고 난 뒤 고인을 추모하며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던 테이블인데 우리 문화도 참 닮았다. 사람 사는 곳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한 방향으로 문화가 발전해 가는 것을 참 많이 보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정말 신기한 생각이 든다.
박물관의 지하 카타콤은 세계 제2차 대전 당시에 대피소로 사용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함께 볼 수 있었다. 대피소로 사용했던 곳은 대략 50개의 방으로 약 350명 정도가 공습을 피해 이곳에서 숨어 생활을 했다고 한다. 폭격에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카타콤보다 더 아래에 곡괭이로 방을 만들고 집마다 번호를 붙여 구별을 했다. 생과 사가 오가는 전시상황이었음에도 벽을 칠하고 타일도 깔고 집처럼 최대한 아늑하게 만들기 위해 이들이 쏟았을 처절한 몸부림은 'I miss you' 한 문장이 모든 걸 설명해주고 있었다.
삶이 끝난 곳에서 끝나지 않고 다시 삶을 이어가는 희망의 장소가 될지 로마인들은 몰랐겠지?
카타콤만 보기 위해서는 라바트 안쪽의 매표소로 가야 한다. 매표소 입구에는 성 바울 카타콤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도록 다양한 전시 자료가 이해를 돕고 있었다. 로마 시대의 매장문화에 대해서 그림으로 쉽게 설명이 되어 있고 조형물로도 만들어 놔서 카타콤 하나만 봐야 한다면 성바울 카타콤 정면의 매표소를 이용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
전시장을 나서면 바로 카타콤으로 이어지는 줄 알았는데 외부로 나가 조금 걸어야 했다. 위냐코트 박물관에서 연결된 성바울 카타콤과 같은 카타콤이라서 모양은 큰 차이는 없었다. 다만 무덤의 모양이나 크기 등은 이쪽이 더 다양한 느낌이었다. 미로처럼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길을 헤매겠다 싶은데 통로에 안내표시가 잘 되어 있어서 크게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메인 출입구와 연결된 카타콤이라 훨씬 더 규모가 크고 더 많은 수의 무덤이 있었다. 규모가 큰 만큼 구역마다 다양한 크기의 아가페 테이블이 있었다. 카타콤의 경우 혼자 구경을 오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임디나와 라바트 도보투어를 통해 가이드와 함께 방문하는 편이었다. 가이드 투어는 대부분 정면 출입구인 이곳 카타콤을 방문하는 느낌이었다.
메인 출입구여서 이곳 카타콤 외에도 한 군 데 지하공간을 보기도 했는데 비슷비슷한 구조여서 대부분은 처음에는 꼼꼼하게 보다가 나중에는 대충 보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고. 이후에 박물관 티켓으로 다시 한번 찾았을 때는 비디오 영상까지 모두 보고 왔는데 기본적인 지식이 좀 쌓이고 난 뒤 다시 방문하니 확실히 느낌이 좀 달랐다.
지하 공간을 다 보고 나면 관람객 대부분은 전시실은 대충 보거나 건너 뛰는 느낌이었다. 몰타의 문화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복도에 너무 많은 사진과 그림이 걸려있으니 보기도 전에 질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나 역시도 지하공간의 유적들을 보고 나니 살짝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카타콤이 가진 음침한 느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숨을 돌린 후 전시실을 둘러봤다. 종교적인 성지인만큼 종교적인 기념물을 비롯해 성요한 기사단 관련 전시품들이 방방마다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볼거리들이 꽤 많았는데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던 성직자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위치에 올려진 나무 상자였다. 나무 상자의 용도는 입장료를 모아두었던 금고였다. 성바울의 동굴은 예로부터 성지였기에 엄청난 사람들이 방문을 하는 곳이라 입장료 수익도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자신의 침대 머리맡에 사다리를 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욕실은 문도 달지 않고 활짝 열린 공간으로 욕조에서 샤워를 하면서도 금고를 잘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는데 왠지 모르게 종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돈에 대한 집착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금욕주의를 표방했던 성요한 기사단도 종말은 부패와 낭비로 몰타에서 쫓겨났는데 왠지 그 현장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 웃음이 나면서도 좀 씁쓸한 느낌이었다.
+ 토리노 수의 복제품(REPLICA OF THE HOLY SHROUD OF TURIN)
기독교와 관련된 유물들도 상당히 많았는데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가장 먼저 '토리노 수의 복제품'이 몰타에도 있다. 토리노 수의는 그리스도가 무덤에 안치되기 전 그의 시신을 감쌌던 수의인데 성요한 기사단에게 선물로 하사한 복제품이다. 크기는 약 30cm x 101cm인데 단순한 복제품이 아니라 토리노 대주교 미카엘 베야무스(Michael Beyamus)가 1663년에 그 진위를 증언한 복제품이다.
+ 성바울의 참수 부조(CAST FROM ALESSANDRO ALGARDI - BEHEADING OF ST PAUL)
성 바울의 마지막 생애인 참수 장면을 조각한 작품으로 1680년 알레산드로 알가르디(Alessandro Algardi)의 작품이다. 사도 바울의 목이 잘릴 때 목이 세 번 튀었는데 자세히 보면 정말 사실적으로 표현이 되어 소름이 돋을 정도다.
+ 슬픔의 마돈나(Madonna of Sorrows)
성요한 대성당의 천장화를 그린 마티아 프리티(Mattia Preti)의 작품으로 설명이 필요 없다. 슬픔을 가득 담은 눈에서 흘러넘치는 눈물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절로 숙연해진다.
+ 휴대용 제단(PORTABLE ALTAR)
성요한 기사단은 종교를 중심으로 모인 군인으로 이들에게 종교활동은 매우 중요했다. 따라서 어디에서든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휴대용 제단과 그것을 넣어 다닐 수 있는 가방을 만들었다. 기사들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종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특이한 건 배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지 않도록 설계가 됐다고 한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전투용 갤리선마다 휴대용 제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이 유일하다고 한다.
며칠 머무는 몰타 여행객이었다면 나 역시 꼼꼼하게 둘러보지 않았을 라바트다. 몰타의 역사를 알면 알수록 나도 모르게 몰타에 흠뻑 스며들고 있음을 그때는 몰랐다.
+ 다음 이야기 : 몰타에는 왜 로마의 유적도, 아랍의 유적도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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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1장과 2장은 브런치북에서 볼 수 있습니다.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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