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어학연수 #9 임디나(1) 왕좌의 게임 촬영지, 임디나 중세축제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9 임디나(1) 왕좌의 게임촬영지, 임디나 중세축제
몰타는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의 시간이 이어지고 있는 나라인데요. 그동안은 발레타 등 중세에 만들어진 곳을 살펴보았는데요. 오늘은 고대도시 '임디나(Mdina)'로 떠나보겠습니다.
여기 영화세트장인가?
임디나 게이트를 본 나의 첫인상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임디나는 '왕좌의 게임' 촬영지로 몰타를 와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단번에 알아차리는 곳일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몰타는 어느 곳이든 중세 분위기인데 특히 임디나의 경우 다른 지역에 비해 더욱 고풍스럽다는 느낌을 가게 되는데 임디나 게이트의 역할이 크다고 하겠다.
발레타가 중세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이라면 임디나는 중세이전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이런 임디나의 역사는 약 2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BC 700경 페니키아인들이 몰타를 지배하게 되면서 가장 처음으로 만든 도시가 임디나인데 지금처럼 성곽의 모양을 갖추게 된 건 로마가 지배하면서부터다. 수천 년 동안 몰타의 수도였던 임디나는 1530년 성요한 기사단이 몰타를 지배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오스만의 잦은 침입은 몰타의 안쪽에 위치한 임디나로서는 방어에 절대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몰타공성전 이후 바다와 접하고 있는 발레타에 신도시를 건설했고 그곳으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오랜 시간 사람들이 살았던 임디나지만 수도가 이전하게 되면 살던 사람들도 신도시로 이주하는 것은 중세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로 북적였던 임디나는 발레타로 수도를 이전하자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하루아침에 조용해졌다. 그래서 갖게 된 임디나의 별명은 '사일런트 시티(Silent City Mdina)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임디나는 몰타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시간이 그대로 남겨졌다.
이런 곳을 그냥 놔둘 리 없지 않겠는가. 영화나 드라마 등 중세가 배경이 되는 다양한 시대극이 임디나에서 촬영이 됐는데 '왕좌의 게임'도 그중 하나다. 또한,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겠는데 현빈이 골목을 달려가던 하늘보리 CF도 이곳 임디나에서 촬영됐다.
출입문이 단 세 개라고요?
발레타도 그렇지만 임디나 역시 성곽으로 둘러싼 요새의 도시다. 적의 침입을 쉽게 확인하기 위해 몰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졌다. 언덕 위에 우뚝 선 철옹성 같은 곳을 출입하는 문은 단 세 개뿐. 영화세트장처럼 보이는 낭만적인 고대도시지만 알고 보면 예로부터 적의 침임이 많았다는 반증이다. 고대 페니키아에 이어 로마까지 그리고 세계사에 등장했던 문명치고 몰타를 거쳐가지 않은 문명이 없다. 몰타를 지배한 자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몰타가 지정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임디나의 메인 게이트는 임디나 게이트로 부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문으로 약속을 정할 때도 '임디나 게이트'에서 만나자고 할 정도로 유명한 스폿이다. 고대도시라는 것과 달리 임디나 게이트를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고대 도시인데 왜 바로크 양식인가?'
임디나 게이트는 고대가 아닌 중세, 즉 1724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그 이유는 1690에 있었던 시칠리아 대지진 때문이다. 시칠리아에서 몰타까지는 약 100km로 상당히 가까운 거리로 시칠리아 대지진의 여파로 임디나의 반 이상이 무너졌을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봤다. 이후 임디나를 재건하게 되는데 당시 성요한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프랑스 출신인 마노엘 데 빌헤나에 의해 재건하면서 당시 유행했던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짓게 된 것이다. 임디나가 고대 도시이지만 고대의 건축물보다 중세의 바로크 양식 건축물이 많은 이유기도 하다. 그 덕분에 임디나는 다양한 시대의 건축물을 볼 수 있는 야외박물관이기도 하다.
임디나 게이트를 들어서면 반드시 뒤를 돌아 임디나 게이트의 문을 올려다봐야 한다. 임디나 게이트 뒷면에 새긴 세 명의 인물을 보기 위함이다. 이 세 인물이 바로 임디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맨 쪽은 성 푸블리우스, 가운데는 사도 바울, 맨 오른쪽은 성녀 아가타이다.
서기 60년 기독교 최초의 선교사인 사도 바올이 로마로 압송되던 중 배에서 좌초해 몰타에서 3개월 동안 머물면서 포교를 하게 된다. 이때 몰타의 총독이었던 '푸블리우스'가 개종을 한 후 몰타 최초의 주교가 되고 임디나에 성 바울 성당을 짓게 된다. 발레타가 성요한 기사단의 도시로 '성요한대성당' 있다면 임디나는 사도 바올의 도시로 '성바울 대성당'이 있다. 특히 성바울 대성당의 경우 몰타의 모든 성당 중 어머니의 성당으로 불릴 만큼 몰타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이다. 임디나에서는 성 푸블리우스, 성 아가타를 잊어버려도 성 바울만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정도로 몰타에서는 중요한 인물이다.
메인 게이트로 사용되는 임디나 게이트 외에 눈여겨봐야 할 문은 '그릭 게이트'다. 몰타는 그리스 지배를 받은 적은 없지만 그리스 사람들이 상당 부분 몰타로 이주하면서 임디나에서 거주를 했다고 한다. 이 문 주위로 몰려 살면서 그리스 공동체를 형성했기에 출입문의 이름도 그릭 게이트가 됐다.
그릭게이트가 중요한 이유는 몰타의 시대별 건축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성벽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임디나 게이트는 새로 지었기 때문에 옛날 흔적을 볼 수 없지만 그릭 게이트의 경우 가장 밑의 돌과 가장 윗부분의 돌이 크기가 다르고 쌓은 방식도 달라 변화된 건축양식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성곽이 시대에 따라 쌓는 방식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지진으로 중세 이전의 건축이 많이 소실된 가운데 임디나의 중세 성벽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부분이라 아주 중요한 유적이다.
나머지 하나의 문은 임디나 사람들이 기차를 타기 위해 사용했던 문이다. 생긴 건 아주 평범한 문이라 기차를 타기 위한 문이라는 게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몰타에 기차가 다녔다고?'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던 1883년에 개통된 기차는 임디나에서 발레타까지 시속 32km로 운행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동차, 버스 등 다양한 운송 수단이 기차보다 빠르다 보니 점점 이용객이 줄어들었고 1931년에 기차 운행이 중단됐다. 기차가 다녔다는 것도 신기한데 임디나 주민들을 위해 특별히 문을 만든 것이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영화 세트장 같은 임디나 게이트를 지나면 본격적인 임디나 탐방이 시작된다. 문을 들어서면 입구에 단두대가 있는데 너나없이 기념사진을 찍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오른쪽으로 상당히 고풍스러운 건물이 있는데 '자연사박물관'이다. 이런 건물이 자연사박물관이라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뭔가 좀 안 어울린다고나 해야 할까. 이곳은 원래 임디나 게이트가 있던 곳이었으나 재건하면서 문을 좀 더 위쪽으로 이동시킨 뒤 빌헤나 수장의 여름궁전을 만든 곳이었다. 20세기 초에는 병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는데 현재는 자연사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어쩐지 박물관 치고 너무 고풍스럽다 싶더라니.
임디나는 입구에서부터 끝까지 채 1km가 되지 않는 정말 작은 도시다. 아무리 나라가 작은 몰타여도 그렇치 수도치고는 너무 작다 싶은데 원래는 임디나 외곽의 라밧까지가 전부 임디나였다. 아랍 시절에 지금의 임디나로 크기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외곽인 라밧과 성곽 안쪽인 임디나는 분위기가 상당히 다른데 라밧은 서민이 살았고 임디나는 귀족들이 살았다.
몰타도 귀족이 있다고요? 물을 수 밖에 없는데 몰타도 귀족이 있었다.
노르만이 지배하던 11세기에 귀족이 생겨났고 당시로선 가장 번화가였던 임디나에 집을 짓고 살았다. 이후 성요한 기사단이 들어오면서 오스만의 방어를 위해 발레타를 건설하게 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발레타로 이전했다. 하지만 대대손손 임디나에 터를 잡고 살던 귀족들은 여전히 이곳에 남았고 지금도 임디나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귀족 가문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는 대략 300여 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대저택을 의미하는 '팔라초'에는 전부 유명한 명한 귀족 가문이 중세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한다. 실지로 이 지역은 매물도 거의 안 나온다고 했다. 어찌 보면 서울의 북촌과도 좀 비슷한가 싶기도 하다.
임디나를 방문한 사람들을 사로잡는 건 임디나 게이트보다는 이 골목이 아닐까 싶다. 팔라초 높은 담장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이 특별한 감성을 자아낸다. 현빈이 하늘보리 CF로 열심히 뛰었던 골목도 바로 임디나의 골목이다. 말 한 마리 정도면 꽉 찰 좁은 골목은 'S'자로 휘어져 끝이 보이지 않는다. 화살이 주 무기였던 중세 때 적이 성을 침입해 올 경우 화살을 피하기 위해 골목을 일부러 휘게 만들었다고 한다. 바둑판으로 반듯반듯한 발레타와 가장 큰 차이점도 바로 '골목'이다.
번화한 도로에서 골목으로 접어들어 휜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사람들의 소리는 사라지고 들리는 건 오직 내 발자국 소리뿐. 사람이 모두 떠나고 정적만이 맴도는 '사일런트 시티' 임디나의 매력은 '중세 골목'만으로도 충분한 곳이다.
귀족들이 사는 곳인 만큼 해설사들은 귀족들이 사는 집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데 그중 하나는 문고리다. 귀족들은 자신 가문의 문장을 디자인해 문고리로 만들어 사용을 했는데 문고리가 자신 가문의 얼굴인 셈이니 공을 들이는 건 당연지사. 몰타 집집마다 굉장히 인상적인 문고리들이 많은데 아마도 임디나의 귀족가문에서 유행이 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메인 거리를 걷다 보면 1층과 2층으로 구분된 특이한 건물이 눈에 띈다. 노르만 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임디나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 양식이다. 팔라초 산타 소피아(Palazzo Santa Sofia)와 팔라초 파손(Palazzo Falzon) 두 개의 건물이 노르만 시대에 지어졌는데 '노르만 하우스'로 불리고 있었다. 독특한 커튼 장식의 무늬와 창문 장식은 전형적인 노르만 건축양식이다. 다른 건물들과는 확연한 차이인데 아마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노르만 건축 양식을 가진 두 개의 건물 중 팔라초 산타 소피아가 더 오래된 건물로 1233년도에 지어졌다. 팔라초 파손의 경우 성요한 기사단장이 한때 머물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가구, 은세공, 책과 무기 등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옥상에는 전망 좋은 카페가 있는데 입장료를 내고 전시를 보지 않아도 카페만 이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다른 볼거리들이 남아 있는 상황이라 카페는 다음에 둘러보기로 했는데 임디나를 여러 번 갔는데 카페 '폰타넬라'가 너무 강력해 팔라초 파손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노르만 건물 옆에 문이 열려 있는 곳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성당이었다. 무심결에 올려다본 성당 천장에 '억'소리가 났다. 성당 천장이 이렇게 예쁠 일인가 싶었다. 이곳은 카르멜라이트 성당(The Carmelite Church)으로 몰타에서 바로크식 타원형 천장으로 지어진 최초의 교회였다.
건축도 건축이지만 이 교회는 몰타 역사에서는 빠질 수 없는 곳인데 바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와 몰타군이 격전을 벌인 곳이다. 이집트 원정을 가기 위해 몰타를 점령한 프랑스 군은 은과 금으로 장식된 성당의 성물을 녹여 무기를 만들거나 팔아서 전쟁에 필요한 물자나 자금을 충당했기에 몰타의 성당들이 프랑스 군에 약탈당하는 것이 부지기 수였다. 프랑스 군이 이 성당의 성물을 약탈하기 위해 접근을 하자 몰타군들이 교회 문을 잠그고 한 소녀가 종탑에 올라가 신호를 보내게 되는데 이 사건으로 몰타인들이 프랑스군과 맞서 싸우는 혁명을 촉발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성당이었다.
문이 닫혀 있었더라면 성당인 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텐데 이런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 줄이야.
임디나의 메인 도로를 따라 계속 걷다 보면 거의 끝부분에 성바울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성바울 성당은 아주 멀리서도 눈에 띌 만큼 임디나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다. 발레타의 성요한대성당이 너무 화려하다 보니 성요한대성당을 보고 나면 몰타의 다른 성당들은 다소 시시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용으로 보자면 성요한이 성바울을 이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 성당은 4세기에 몰타 최초의 총독이던 푸불리우스 아버지의 병을 사도 바올의 기도로 낫게 되자 푸불리우스는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몰타 최초의 주교가 된다. 그리고 자신의 집터에 몰타 최초의 성당인 성바울 성당을 지었다.
'어, 그런데 성바울 성당이 왜 이렇게 현대적인 것이지?'
의문을 갖는 건 당연하다. 로마의 지배후 9세기 경 몰타는 아랍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당시 성 바울 성당은 파괴되었고 13세기 노르만 시대에 다시 재건되었다. 그러다 시칠리아 지진의 여파로 성바울 성당 역시 거의 무너져다. 이후 1702년에 다시 재건됐기에 4세기 성당의 역사와 다소 거리가 있는 18세기 건축양식으로 지어지게 된 것이다. 지진이 아니었다면 임디나는 아마도 지금과는 조금 더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발레타 성요한 성당의 화려함은 없지만 성바울 성당의 가진 웅장함이 경건한 마음이 절로 들게 했다. 천장화는 성바울의 일대기를 표현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의 마지막 처형 장면과, 베드로를 상징하는 거꾸로 십자가 장면까지 모두 그려 넣은 점은 특이했다.
중세도시 임디나는 '조용한 도시'이지만 시끌벅적해지는 때가 있으니 바로 7월 뜨거운 여름이다. 성바울 성당 주변으로 '임디나 중세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몰타의 여름은 매주 다양한 축제가 열리기 때문에 분위기 자체가 중세인 임디나에서 열리는 '중세축제'가 별 거 있겠나 싶었다.
큰 기대 없이 찾아간 임디나 중세 축제였는데 매시간마다 다른 콘셉트로 중세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관람객 참여형 축제로 유, 무료로 다양한 체험이 있었고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중에는 성당 광장 앞마당에서 자연스럽게 관광객들 사이에 끼어서 내가 춤을 추고 있을 정도였다. 이틀 연속으로 축제를 보기 위해 찾아갔을 정도로 축제는 기대이상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방마다 축제가 있기는 하지만 스토리텔링도 부족한 데다가 즐길거리나 볼거리 등 어딜 가나 비슷비슷하니 식상하다는 느낌이 든 적이 많았다. 우리나라 축제 기획자나 특히 지자체 공무원들의 경우 꼭 이 중세 축제만은 벤치마킹 해보라고 추천하고 싶을 정도였다.
임디나에는 다양한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지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폰타넬라다. 케이크 맛집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몰타 전역을 바라볼 수 있는 뷰 맛집이기 때문이다. 임디나에서 다른 카페도 가보고 싶었는데 어쩌자고 매번 폰타넬라에서 매번 같은 메뉴만 먹었던 것인지 그 참. 맑은 날이면 임디나에서 세인트줄리앙의 힐튼호텔까지 다 보이는 파노라마 풍경에 취했다고 할 수밖에.
+ 다음 이야기 : 한때 임디나였던 라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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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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