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원에서 가장 처음 만난 친구는 콜롬비아에서 온 안드레아다. 어학원에서 수업은 선생님이 문법이나 어휘 등을 설명하고 난 후 옆에 앉은 사람과 대화를 하도록 시키는데 그때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안드레아였다. 통상 첫 대화의 단골메뉴는 '어느 나라에서 왔냐, 취미가 뭐냐,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냐, 몰타에 얼마나 있을 거냐'가 거의 공통 질문이다. 안드레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트레킹을 좋아한다고 말을 했었다. 그게 첫날에 있었던 대화였던 거로 기억한다.
그랬는데 며칠 후 갑자기 연락이 왔다.
"이번 주 주말에 트레킹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Of course!!"
그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몰타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첫 주 주말에 갑자기 트레킹을 가게 됐다.
몰타에서 가장 먼저 만난 외국인 친구들 마이라(mayra)와 안드레아(Andrea)
트레킹 멤버는 안드레아와 마이라 그리고 나 이렇게 단 3명이었다. 마이라는 처음 만났는데 안드레아와 같은 콜롬비아 출신으로 나보다 어학연수를 먼저 온 상태라 이미 둘은 친구가 된 상태였다. 어학연수를 가게 되면 '외국 친구 사귀기'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이 있는데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물론 성격적으로 외향적인 사람은 친구를 좀 더 쉽게, 빨리 사귈 수 있는 건 맞지만 내성적이라고 해도 시간이 지나가면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생기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클래스 메이트로 친구가 한 명 생기고 나면 다음부터는 순식간에 거미줄을 치듯 친구가 늘어난다. 그 친구의 친구, 내 친구의 친구가 서로 친구가 되고 반이 바뀌게 되면 또 그 반의 친구들, 친구의 친구의 친구 등 처음에 한 명이었던 친구는 고구마 엮이듯 줄줄줄 순식간에 친구가 만들어진다.
다행히 몰타에서 트레킹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난 덕분에 첫 주부터 시작한 트레킹은 몰타는 떠나는 마지막 주까지 이어졌다. 사실, 어학연수지를 몰타로 결정하면서 꼭 하고 싶었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몰타 해안선을 따라 몰타를 크게 한 바퀴 걸어보기였다. 몰타라는 나라가 작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지중해 한가운데 있는 섬이니 바닷가를 따라 걸어보는 것도 나름은 특별한 추억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이 원대한 계획은 반은 성공이었고 반은 실패였다.)그러나, 아무리 내가 걷기를 좋아한다고 해도 낯선 나라에서 온 지 일주일 만에 몰타 생활에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혼자 트레킹을 하기는 어려운데 먼저 트레킹을 가자고 하니 따라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평소라면 트레킹 코스를 정할 때부터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편이기는 하지만 나보다 앞서 몰타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이고 그들이 초대한 만큼 그들이 정한 대로 따라가 보기로 했다.
오늘의 트레킹 코스는 몰타 중세의 수도였던 임디나를 지나 해안절벽이 멋진 딩글리까지로 몰타섬을 정확히 반을 가르는 코스다. 약 14km고 약 3시간 정도 걸리니 첫 트레킹 치고는 다소 먼 거리 이긴 해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이후로 걷기는 생활이 되다시피 했기에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첫 트레킹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설렜다. 오늘 걷게 될 임디나는 몰타의 중세 수도였던 곳으로 '왕좌의 게임'의 배경이 된 곳이다. 딩글리는 절벽이 아름다워 몰타에서 꼭 가야 하는 여행스폿 중 하나인 곳이다. 걸어서 만나게 될 임디나와 딩글리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됐다.
세인트 줄리앙에서 임디나를 거쳐 딩글리 절벽까지 총 14km
내가 살고 있는 세인트 줄리앙에서 출발하기로 했고 카페 페페로치노(peperoncino) 골목 사이로 난 길을 걷는 것으로 트레킹이 시작됐다. 이왕이면 날씨가 좋기를 바랐는데 잔뜩 찌푸린 하늘인데 다행히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이국적인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몰타의 풍경인데 돌틈사이를 비집고 나온 들꽃을 보니 작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은 몰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 LG 간판을 몰타에서 만나니 두 배로 반갑다. 코로나 기간에 한국의 위상이 엄청 올라갔다고 하는데 아직은 크게 실감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LG 간판 하나에도 마음이 뿌듯해졌다.
어떤 동네를 지나가다 보니 꽃가게가 보여서 잠깐 쉬는 동안 기웃거렸다. 처음에는 꽃집인 줄 알았는데 꽃가게이자 모종을 파는 곳이었다. 몰타도 3월에는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는 시기인 것 같았다. 토마토, 상추, 호박 등 유럽은 우리와 다를 줄 알았는데 같은 모종이 있어 신기했는데 가장 신기했던 것은 가지였다. 무슨 가지가 애호박 뻥튀긴 것처럼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나중에 마트에 가보니 와~ 진짜 가지가, 가지가, 가지가... 어찌나 큰지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다.
나는 아예 구글지도 확인을 하지 않고 이들을 따라가고 있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길이 잘 못 된 것 같다며 구글지도를 꺼내서 확인하고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는 것이 아닌가. 나도 첫 트레킹이었지만 이들도 알고 보니 첫 트래킹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이렇게 저렇게 헤매다가 다시 방향을 확인하고 길을 나섰다.
몰타 중부에 위치한 비르키르카라(Birkirkara)에 도착했다. 비르키르카라는 몰타에서 가장 큰 도시로 몰타에서 관광객이 주로 머물다가는 발레타, 세인트 줄리앙, 슬리에마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몰타의 중부 도시 중 가장 큰 도시인 비르키르카라
대로변에서 골목을 따라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중세 속으로 걸어 들어간 느낌이었다. 게다가 건물과 건물사이로 난 골목은 또 어찌나 예쁜지. 동네 구경하느라 걷기는 뒷전이 됐다. 특이하면서도 예쁜 이국적인 골목 풍경에 저절로 발이 멈췄다. 마치 영화 세트장 같은 골목길을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개를 산책시키던 동네 아저씨가 나를 신기한 듯이 쳐다본다. 비르키르카라는 현지인들이 사는 곳이라 관광객들은 거의 가지 않는 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동네 골목길을 외국인 여자애들이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고 있으니 무척이나 생소한 풍경이었으리라.
"동네가 참 예뻐요!" 하니 아저씨가 수줍은 듯 웃으시며 여기는 관광객도 별로 안 오는 곳이고 조용하고 한갓진 곳이라고 하신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걷는 우리의 발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퍼진다. 문득 2층을 바라보니 작은 소란이 싫지 않은 듯 베란다에서 우리를 지켜보신 분과 눈이 딱 마주쳤다. 느낌은 다르기는 해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느낌과 참 비슷하든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중세 골목에 빠져있다 보니 문득 몰타 요한 기사단이 십자군 전쟁 때 이 골목을 걸어서 지나는 풍경은 정말 장관이었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중세의 시간이 그대로 박제된 이국적인 몰타는 첫날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몰타의 또 하나의 매력은 바로 골목!!
그러다 어느 성당 앞에서 발이 멈췄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 헬렌 대성당(St Helen's Basilica)으로 바실리카 성당답게 규모도 상당했지만 뭔가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문이 닫혀있었는데 주변 골목 탐방을 하고 다시 돌아오니 성당 문이 열려 있었다. 성당 안의 모습이 궁금한 나와 달리 친구들은 크게 흥미가 없어 보였지만 용기를 내서 안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렇게 성당 안으로 들어선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앙 재단을 비롯해 사방으로 장식된 기둥에는 성상이 자리를 잡았고 각 천장에는 화려한 성화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성당 내부 모습에 놀라움이 한가득이었는데 마침 성당 안에 있던 관계자분이 흔쾌히 성당에 대해 설명을 해주겠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 영어 리스닝 테스트가 됐다. 이때만 해도 엘리멘터리라 안 그래도 어휘가 부족한 상태인데 전문적인 성당 용어와 종교용어들이 막 튀어나오니 사실은 2/3 이상은 못 알아 들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게다.
나중에 트레킹 다녀와서 이 성당이 너무 궁금해 자료를 찾아보니 이 지역은 15세기 몰타에 있던 12개의 본당 중 하나였던 곳으로 이곳에는 원래 다른 성당이 있었다고 한다. 1856년에 진도 7.7~8.3의 크레타 대규모 지진 때 성당이 피해를 입자 이곳에 다시 성 헬렌 성당을 짓게 됐고 외관은 임디나 대성당에서 모티블 받아 지어졌다고 하는데 실제로 임디나 성당의 외관과 상당히 비슷했다. 처음에는 교구 성당이었다가 나중에 바실리카가 된 곳으로 몰타에서 가장 큰 교회 종이 있는 성당이라고 한다. 성당 관계자분 말로는 8월에 있는 성 헬렌 축제일에 행렬도 있고 여러 가지 행사가 있어 볼거리가 많다고 했다.
참고로 몰타는 카톨릭 국가로 성당만 무려 약 360여 개가 있다고 한다. 이혼이 합법화 된 건 몇 해 전의 일인데 그보다 앞서 유럽에서 가장 먼저 동성 결혼이 허용된 건 정말 아이러니다.
화려함으로 눈이 휘둥그레진 성 헬렌 대성당
어쨌거나 몰타에서 처음 본 성당인 성 헬렌 대성당 안에서 한참을 시간을 보내고 나니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친구들에게 좀 미안했다. 다행히 이곳에서 마이라의 가족들을 만날 예정이라고 했는데 가족들이 조금 늦게 오는 바람에 그나마 덜 미안하게 됐다. 마이라의 가족들은, 정확히 말하면 사촌이라고 했는데 몇 해 전에 몰타로 이민 와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들도 트래킹에 합류하는 줄 알았는데 어린아이까지 있어 그들을 먼저 차로 임디나로 가서 우리를 기다리기로 했고 대신 그들이 키우고 있는 애완견을 산책시켜야 한다고 해서 졸지에 개를 데리고 임디나까지 트래킹을 하게 됐다.
개와 함께 임디나까지 트래킹
몰타는 뭔가 다른 유럽과 분위기가 묘하게 다른 느낌이 있는 건 어쩌면 이 독특한 테라스 때문이 아닌가 싶다. 몰타는 시칠리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로 시칠리아와도 느낌이 비슷하다고 했지만 몰타의 테라스는 시칠리아에 없는 건축이라고 했다. 이런 테라스 양식은 오스만의 침략 이후로 나타나는 건축양식이다. 나중에 터키에서 온 친구를 만나게 됐는데 그 친구 왈 몰타에 왔더니 터키랑 너무 비슷해서 몰타에 온 것인지 터키에 있는 것인지 거의 차이를 못 느끼겠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뭐가 됐던 내 눈에는 정말 몰타스러운 테라스 풍경에 꽂혔다.
비르키르카라를 떠난 지 얼추 1시간이라 간식도 먹고 아픈 다리도 잠시 쉬어갈 겸 공원으로 들어가고 보니 와- 몰타에 이런 초록색의 공원이 있나 싶어 깜짝 놀랐다. 이곳은 샌 안톤 가든(Il-Ġnien ta' Sant'Anton)으로 영국이 몰타를 지배하던 시절에 지어진 영국식 정원이었다. 몰타를 떠나기 전에도 이곳을 찾았을 정도로 개인적으로 참 좋아했던 곳으로 따로 소개를 할 예정이다.
영국식 정원의 샌안톤 가든
샌 안톤 가든을 지나 다시 또 몇 개의 마을을 거치고 나니 임디나까지 본격적인 도로길이 이어진다. 도심을 걷는 트레킹이긴 해도 세인트 줄리앙을 출발해 비르키르카라까지는 골목이 계속 이어지고 있고 현지인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비르키르카라를 벗어나기 시작하면서는 줄곧 도로길이라 지겹기도 하고 다리도 슬슬 아파온다. 하지만 함께 걷는 친구들이 있어 그나마 참을만했지만 다시 가라면 너무 힘들어서 절대로 안 갈거라 굳은 다짐을 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기분이 드는 건 좀 묘했다.
임디나가 점점 가까워져 지니 들판은 온통 초록이다. 3월인데 청보리가 한창이고 선인장, 아마폴라, 국화류의 꽃들을 비롯해 이름 모를 들꽃까지 지천으로 꽃이 한가득이다. 몰타는 건조한 곳이라 생각했던 나의 고정관념은 초록촉한 몰타의 3월 앞에 무력화됐다. 몰타는 4월이 들어서면 10월 말까지는 거의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은 서서히 말라 메마름이 거의 10월 말까지 지속된다는 걸 이때는 알지 못했다. 우리나라와 달리 겨울이 되면 온통 초록이고 여름이면 정말 메마른 모습을 가진 곳이 바로 몰타였다.
온통 초록초록 했던 몰타의 3월
그 초록 들판에 신비한 모습으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임디나다. 임디나는 중세 때 몰타의 수도로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고색창연한 도시다. 그래서인지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되기도 했는데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은 '왕자의 게임'이다. 임디나 성문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정면의 모습이 촬영됐는데 그래서인지 '임디나 게이트'로 불리는 입구 성문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 중세의 도시답게 7월에는 중세축제가 열려 몰타 중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도 중세축제의 모습과 함께 따로 포스팅할 예정이다.
왕좌의 게임이 촬영된 임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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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디나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인 '폰타넬라(Fontanella)'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마이라의 가족들이 먼저 기다리고 있기도 했고 간단한 요기를 한 후 딩글리까지 다시 트레킹을 하기로 했다. 임디나에는 카페와 식당들이 있지만 폰타넬라가 가장 유명한 이유는 전망이 가장 좋기 때문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발레타까지는 아니어도 세인트 줄리앙을 비롯해 몰타의 도시들을 발아래로 바라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몰타 다른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카페 폰타넬라.
폰타넬라에서 바나나 크레페로 당충전을 하고 쉬는 사이에 처음 출발할 때와 달리 먹구름이 잔뜩 끼어 날씨는 꽤 쌀쌀하고 한바탕 비가 쏟아질 것 같다. 게다가 골목길 탐방에, 예정에 없었던 성당 구경하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해서 딩글리까지 가는 건 무리였기에 다들 오늘 트레킹은 임디나에서 끝내기로 의견일치. 다음 주에 임디나에서 딩글리까지 트래킹 하기로 다시 약속을 잡았다.
나중에서 세인트 줄리앙에서 임디나까지 걸어갔다고 하니 다들 깜짝 놀랐다. 아마 이렇게 걸어간 사람은 우리 3명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 장담한다. 길을 걸었던 덕분에 만날 수 있었던 몰타의 아름다운 골목들, 그리고 관광객들이 거의 90% 이상인 세인트 줄리앙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현지인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