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몰타 생활이 시작됐다. 외국 생활에 있어 가장 처음 적응해야 할 것은 바로 시차적응이다. 몰타와 한국의 시차는 8시간이니 몰타 시간으로 오후 4시면 한국은 자정이니 점심 먹고 나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한국 리듬에 맞춰진 나의 생체시계에 따라 미친 듯이 졸음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특히 몰타에 도착한 첫날은 거의 졸음과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쏟아지는 졸음을 막기 위해 도착한 첫날 가벼운 산책도 했다. 저녁에는 한국 유학원에서 집으로 초대해 줘서 입국동기들과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며 시간을 보낸 후 자정이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푹 자고 일어나니 오전 6시 정도. 첫 날도 둘째 날도 눈뜨면 시계는 어김없이 6시에서 6시 30분다. 다행이다. 크게 무리 없이 완벽하게 시차 적응을 했구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테라스로 나가 하늘을 보는 일은 어느새 하루 중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됐다. 그리고 어김없이 매일 아침의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일출맛집'이었다. 굳이 힘들게 일출을 보러 가지 않아도 우리 집 테라스에서 보는 일출이 참 좋았다. 매일 보는 일출인데도 매일이 다르고 시시각각으로 붉어지는 하늘은 언제나 감동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느긋하게 테라스에 앉아 일출을 보며 커피도 한 잔 하고 멍 때리고 앉았다가 일기도 쓰고 싶었다. 하지만 몰타의 3월 날씨는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아침 바닷바람이 생각보다 쌀쌀했다.
테라스에서 일출을 보는 것이 매일 아침 일상이 되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작 두 달의 유럽 여행에도 시차적응을 힘들어했는데 나는 몰타 체질인가 보다.'
평생을 저녁형 인간으로 살아온 나를 새벽형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몰타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매일 아침의 일출 감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몰타 시차에 완벽적응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리가.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몰타에서 일상이 시작되고 한 달 정도 지나니 원래의 기상시간으로 돌아왔고 몰타도 점점 해 뜨는 시간이 빨라지고 있으니 눈 뜨자마자 후다닥 테라스로 달려가 보지만 이미 해는 완전히 떠올랐더라는. 온전히 나만의 착각이었고 시차적응이 안 됐다기보다는 덜 됐던 것이었다.
50년간 한국 시간에 적응된 몸에 밴 습이 어디 하루아침에 그리 쉽게 바뀌겠는가.
3월 몰타의 일출
+ 지중해 바다를 따라 아침 산책
아침에 눈을 뜨면 침대에서 꾸물거렸던 한국과 달리 몰타에서는 아침은 좀 더 색다르게 생활해 보리라 마음을 먹었었다. 여행지에서 아침 산책하면서 자연스럽게 현지인과 나누는 스몰토크는 다분히 허세적이라고 하더라도 좀 로망이지 않은가. 몰타는 태양의 기운이 강한 나라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에 눈뜨면 창밖으로 이런 풍경이니 집에서 흐느적거리면서 시간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웠다. 그렇게 해서 몰타 도착한 첫날부터 시작된 아침산책이었다.
몰타에 도착한 첫날 눈이 너무 일찍 떠졌다. 밖은 이미 환해졌고 황사라곤 없는 날씨가 정말 화창하다. 무작성 집이 위치한 세인트 줄리앙(San Ġiljan, Malta)에서 가는 데까지 가보자 싶어 걸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한참을 걷다 보니 공사가 한창이라 걷기에는 애매한 곳에 도착했는데 슬리에마의 끝부분 버스 정류장에 있는 공원(play ground)이었다. 집에서 슬리에마의 작은 공원까지 왕복 약 6km니 대략 왕복하면 만 보 남짓. 거리도 적당했지만 무엇보다 도심이라고 하지만 지중해를 접하고 있는 몰타의 특성상 도심에서 바닷가를 따라 걸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길인지라 아름다운 풍경이 걷기에는 더없이 좋은 코스였다.
이곳은 몰타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세인트 줄리안과 슬리에마를 연결하는 도로로 해변을 따라 늘어선 카페는 전용 풀장을 함께 운영하는 곳도 많아 여름에는 사람들이 엄청 몰리는 곳이다. 여름에는 꼭 카페의 전용풀장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스피놀라 베이(Spinola bay), 발루타 베이(Balluta bay), 엑실스 베이 비치(Exiles Bay Beach), 슬리에마 비치(sliem beach) 등 이 코스와 접하고 있는 바닷가 곳곳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엄청 많다. 그야말로 해수욕의 천국이요, 몰타 핫플이다. 나로선 집 앞이 온통 해수욕장인 셈이라 더없이 좋았다.
세인트 줄리언스에서 슬리에마 입구까지 왕복 약 6km는 나의 주요 산책 코스
집에서 출발해 도로를 따라 걷다가 길이 지겨워질 즈음 바다로 연결된 길이 나오면 고민하지 않고 바다로 내려간다. 몰타는 모래사장이 있는 해변이 몇 군데 없고 대부분 이렇게 락비치(Rokcy Beach)다. 울퉁불퉁한 돌은 마치 먼 옛날 화산이 흘러간 것 마냥 불규칙한데 계속 보고 있으면 뭔가 규칙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닷물이 들이치는 부분을 제외하고 이끼가 많이 생기는 지형은 아니었지만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보다시피 돌인지라 큰 사고가 날 수 있어서 조심하면서 걸었다. 그러다 좀 편편한 지형이 나오면 달리기도 가볍게 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산책하는 기분이 꽤 좋다.
이것이 몰타의 락비치
또 하나 신기한 것은 염전을 해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실제로 고조섬에는 염전이 남아 있어 여전히 소금을 생산하고 있고 소금은 몰타의 특산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슬리에마 해변에서도 소금을 채취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지역 주민에게 물어보니 소금을 생산하긴 했는데 언제 그만둔 것인지, 왜 그만둔 것인지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구글 검색을 해도 고조 소금 외에는 나오는 내용이 별로 없었다. 추측컨대 도심지로 발달을 하면서 차들이 많이 다니는 등 소금 생산을 하기엔 환경이 너무 변해버려 그만두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도심에 염전의 흔적이라니 -
그렇게 바다를 따라 걷다 보면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는 엑셀스 베이 비치가 나온다. 바닷가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에서는 스피놀라베이가 정면으로 보인다. 사진 정면에 보이는 주황색 건물이 힐튼호텔이고 그 옆에 큰 건물이 다 지어지면 세인트줄리안의 또 다른 랜드마크가 될 쇼핑몰인데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를 설계한 건축가 자하하디드의 작품이다. 바다가 일자라인이 아니라 만으로 형성되어 있다 보니 스피놀라베이는 곡선을 그리며 안쪽으로 들어와 있어 대체로 잔잔하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지중해라는 생각은 까먹고 살았던 것 같다.
더운 나라 사람들은 다소 게으르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몰타는 좀 달랐다. 아침 이른 시간부터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도 많고 해변을 따라 산책을 하거나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 하다. 특히 이런 공공장소의 공원에서는 요가, 복싱 등 다양한 강습이 이뤄지고 있었다.
요가 수업이 흥미가 있어 물어보니 오전 7시에 시작해 90분 수업이라고 했다. 학원 수업이 화, 목은 9시에 시작하니 일주일에 2번은 무조건 빠지게 되는 상황인지라 해변에서 요가클래스는 실천하지 못한 로망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한 번은 무료 체험이 가능하니 체험만 해도 좋다고 했지만 어차피 등록을 못할 수업이라 인스타그램 팔로워만 하고 돌아섰다. 관광객들이 워낙 많이 찾는 곳이라서 그런지 꼭 한 달이 아니어도 단기로나 회기당으로도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점은 흥미로웠다.
이른 아침부터 다양한 운동을 하는 몰타
이 공원이 독특한 점은 수많은 길고양이들의 천국이라는 점이다. 가장 먼저 엄청난 크기의 고양이 조형물이 있는데 멀리서도 눈에 띈다. 몰타는 길거리에서 개보다 고양이를 흔히 볼 수 있는데 길고양이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사람들과 친화적인데 다 이유가 있었다. 일단 고양이가 사람을 전혀 피하지 않는다. 의자에 앉아 있으면 자연스레 옆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사람의 손길을 피할 때는 자신이 귀찮을 때 '만지지 말라냥' 하면서 잰걸음으로 걸어 다니는 모습이 아주 흔한 곳이 바로 몰타였다.
큰 고양이 조형물이 눈에 띄는 곳.
정말 신기해서 한동안 이곳을 지켜보고 있으니 매일 고양이를 돌보러 나온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고양이가 족히 7~8마리는 됐는데 하나하나 이름을 다 부르며 밤새 안녕하며 고양이의 안부를 살뜰히 챙기고 있었다. 고양이들도 익숙한 냥 그녀에게 너무도 자연스레 손길을 맡기고 있지 있다. 몰타에 사는 길고양이들이 아마 가장 행복한 고양이들이 아닐까 싶었다. 옆에 붙어 있는 안내문에는 고양이 자원활동가들의 활동을 홍보하는 안내문도 볼 수 있었다. 당연히 기부도 받고 있는 중이고.
이곳 외에도 공원 곳곳에는 고양이들이 언제든지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다양한 시설물을 볼 수 있었다. 어디선가 닭울음소리가 들린다 싶었는데 닭 한 마리가 툭 튀어나왔다. 고양이뿐만 아니라 닭도 있고 집에서 키우는 다른 동물들도 같이 살아가는 이 공원은 뭐라 딱히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어주고 있는 곳이었다. 특히 고양이 조형물 아래에는 공중 화장실이 있어 유용했다. 물론 깨끗하게 관리가 되고 있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렇게 슬리에마 입구까지 걸어간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여전히 바다를 따라 걸었다. 낡디 낡은 조형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열심히 요가를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요가매트를 가지고 간 것도 아니지만 요가매트가 필요 없이도 할 수 있는 동작을 꽤나 열심히 하고 있었다. 나도 같이 요가를 해도 되겠냐고 물어보니 흔쾌히 좋다고 하길래 옆에서 같이 동작을 따라 하다가 나는 나대로 요가를 하는 동안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떠올랐다. 들리는 것 철썩이는 파도소리 뿐. 바다와 내가 어느새 하나가 되어 간다.
우리나라였다면 감히 도전해보지 못했을 장소에서 요가도 몰타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었다. 이미 오랜 기간 요가를 했던 나로서는 굳이 요가클래스를 가지 않더라도 이곳 사람들처럼 내가 하고 싶은 곳 아무 곳에서나 요가를 하면 될 것 같았다. 다만, 아직도 여전히 이 상황이 좀 어색하기도 하니 뻔뻔해질 용기가 좀 더 필요는 하겠지만 말이다. 다행히 이날 이후 '여기서 이런 걸 해도될까?' 라며 눈치 먼저 신경쓰던 시간은 얼마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