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스튜디오에서 일 년에 단 한 번만 진행하는 수업들이 있다. 그 계절에 꼭 먹어야 하는 음식들, 이를 테면 정월 말날에 맞춘 간장과 된장 수업, 암꽃게의 알과 살이 가장 통통히 올라있는 봄날의 게장수업, 우리 요리수업에 많이 쓰는 양념 중 하나인 매실청, 유자청과 생강청수업 등등. 우리 스튜디오에서는 이를'계절특강'이라 부른다. 그리고 계절특강에서 가장 압도적인 무게감을 자랑하는 건 바로 여름김치 특강과 김장김치 특강. 일 년에 한 번만, 그 제철 시즌에만 진행하기 때문에 놓치면 일 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언제나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는 수업이다. 한국인의 밥상에 김치는 빠질 수 없기에.
우리 김치수업은 특별하다. 수업 1타임에 3가지 전통 김치를 모두 실습하는데, 수강생님들은 각자 김치통을 3개씩 가져오셔서 자신이 담근 김치는 모두 김치통에 담아 댁으로 가져가신다. 그 김치들이 결코 적은 양이 아니기에 수강생님들껜 그 계절 내내 냉장고 한 켠을 든든히 지켜준다고 하여 김치수업은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더 좋아하는 수업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혹은 남편이 가서 김치 제대로 잘 배워 오라고 등 떠밀어 보내는 경우들도 적지 않다.
김치수업은 준비하는 데 엄청난 시간과 체력을 필요로 한다. 오죽하면 옛날부터 김장은 집안의 가장 큰 연례행사 중 하나였을까. 우리 또한 절임배추가 아닌, 엄마가 직접 전날부터 미리 모든 배추와 채소류를 소금물에 절여 준비한다. 물론 대체할 수 있는 시판 상품들도 많이 나와있지만, 1부터 10까지 모든 과정을 자신의 손으로 완성해야 하는 엄마의 타고난 완벽주의 성격상 어찌할 도리가 없다. 무척이나 고되고 힘든 과정이지만 그럼에도 수업이 끝나면 뿌듯함에 즐거운 마음으로 귀가하는 수강생님들의 무거운 양손을 보면서 우리도 엄청난 성취감을 느낀다.
사진 출처: 본인 제공
작년에도 김장김치 특강을 앞두고, 어떤 김치를 알려드릴까 고민하던 엄마는 sns 피드를 빠르게 손으로 넘겨가며 요즘 김치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엄마 눈에 들어온 건 보쌈김치. 이건 오리지날 보쌈김치가 아닌데, 엄마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생각에 잠기더니 '올해 김장김치에는 해물보쌈김치를 넣어보자, 내가 제대로 알려줘야지!' 다짐했다. 그렇게 작년 김장김치 특강에는 통배추김치, 해물보쌈김치, 파김치를 다루었다.
어김없이 김치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맥이 탁! 풀리며 긴장감은 사라지고 온몸이 노곤노곤 기분 좋아지는 시간. 얼마 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약... 70대쯤 나이가 지긋하신 어느 할아버지의 전화였다. 엄마는 사뭇 놀란 얼굴로 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끔 웃기도 하고 때로는 난감해하기도 하면서 긴 통화를 마쳤다. 전화의 요지는 이랬다.
사진 출처: 본인 제공
맛있는 김치가 드시고 싶었던 할아버지께서는 인터넷으로 보쌈김치를 검색해 사진들을 보시다가, 우연히 내가 블로그에 업로드한 우리 수업후기글을 보셨다. 그리고 당신이 어릴 적 형님과 혜화동에서 맛있게 드셨던 보쌈김치와 똑같이 생긴 김치를 보고 깜짝 놀라셨다고 한다. 인터넷으로 보쌈김치 사진들을 검색해 보면 잘못된 사진과 정보가 많아 안타까우셨던 차에 마침 우리 김치가 할아버지 시선을 확 잡아끌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제대로 된 김치를 먹고 싶은데, 요즘 맛있는 김치 찾아보기가 힘들다며 부탁인데 그 보쌈김치를 본인 드실 양만큼만 조금 팔아줄 수 있겠냐고 부탁하셨다.
엄마는 너무 죄송하지만, 그 사진은 저희가 김치수업을 하면서 담은 김치이고, 따로 김치를 판매하고 있지는 않다며 정중히 거절하려 했으나 할아버지는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다. 대가는 얼마든지 치를 테니 어려워 마셔라, 오랜만에 추억을 느껴볼 수 있게 사람 하나 살린답시고 좀 도와달라며 완강하게 나오셨다. 원래 본인은 호주에 거주하시는데 한국에 잠깐 들어오셨다가 코로나 때문에 발이 묶인 상태, 그래서 어차피 외국으로 다시 나갈 몸이라 그리운 고향의 음식은 언제나 잊을 수 없다며 때를 부리시기도 했다. 엄마의 유독 약한 포인트가 외국 타향살이인데, 하필 그 점을 할아버지가 어찌 알고 콕 건드리셨다.
사진 출처: 본인 제공
엄마는 결국 손을 들었다. 다만 지금 당장 김치를 바로 보내드리긴 어렵고, 가까운 시일내 바쁜 일정들이 좀 정리된 후 그때 김치를 따로 만들어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할아버지는 무척 기뻐하셨다. 아무렴 얼마든지 선생님 편하신 때에 진행하시라며 이후 전화를 끊고, 곧바로 계좌이체로 비용을 송금하셨다. 쿨거래가 따로 없다.
사실 엄마도 말씀은 그렇게 드렸지만, 바로 다음날부터 다시 해물을 사고 김장용 배추를 구입하는 등 김치 준비를 조금씩 서둘렀다. '얼마나 드시고 싶겠니, 오죽하면 저렇게 전화를 주셨을까' 하며 하루라도 빨리 드실 수 있게 때 아닌 김치 숙제를 시작했다.
그렇게 예정보다 빠르게 준비된 해물보쌈김치. 할아버지 댁으로 안전히 퀵 배달을 보내고 간단한 안내사항을 문자로 보내드렸다. 할아버지는 또 전화를 주셨다. 아이고 선생님, 빠르게도 부지런히 만들어 보내주셨네. 내가 고마운 마음에 직접 태극당 빵을 사들고 방문하려고 했는데 벌써 보냈소, 내가 하필 지금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 술을 한잔 하고 있어 못 가지만 다음에는 꼭 태극당 빵을 사서 감사함을 보답하리라. 할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시며 너무 즐거워하셨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서 그 마음이 묻어났다. 맛있게 드시고 좋은 시간 보내시라며 전화를 끊은 엄마는 '그 시절 어르신들께는 태극당 빵이 최고 좋은 빵이야' 어르신 재미있는 분이시네, 했다.
사진 출처: 본인 제공
그리고 일 년 뒤. 그러니까 며칠 전이다. 수업 중인데 자꾸 전화가 오길래 용건을 문자로 부탁드렸다. 이후에도 몇 번 더 전화가 오더니 문자로 남겨진 용건.
[보쌈김치주문하고싶어요]
할아버지가 일 년 만에 또 연락을 주셨다. 반가움이 앞서는 마음에 수업 끝나자마자 엄마가 바로 전화를 드렸다. '잘 지내셨어요, 선생님? 벌써 일 년이 지났네요. 작년에 보쌈김치는 맛있게 드셨어요?'
"맛있게 먹었으니 내가 이렇게 또 전화를 했지"
역시 범상치 않은 쏘쿨한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올해 김장김치 수업은 아직이냐며, 작년에도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아 또 생각나서 전화를 드렸다고 하셨다.
사진 출처: 본인 제공
"올해 김장김치 수업은 11월에 있을 예정이에요. 그런데 너무 죄송하지만 올해 식재료 물가가 많이 올라서, 작년 김치 가격에서 약간 변동이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 선생님은 그냥 편하게 예정대로 김치수업을 하시면 되고, 나는 선생님이 김치를 담아 보내주시면 그걸 먹으면 되고, 금액이 얼마든 상관없이 나는 그 값을 치를 준비가 돼 있으니 어려워 마세요."
역시 할아버지는 올해 겨울에도 엄마의 보쌈김치를 드실 준비가 되어있으셨다. 엄마는 그럼 11월에 김치수업을 하고 다시 연락드리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엄마, 할아버지 호주 다녀오셨대?' '아니, 안 가셨대. 그냥 한국에서 사시는 것 같아.' 내 웃음 포인트다. 엄마가 졌다. 할아버지가 한 수 위시네.
그래서 우리는 오는 11월 둘째 주 김장김치 특강에 해물보쌈김치를 작년에 이어 또 한 번 다룰 예정이다. 이번에는 통배추김치, 해물보쌈김치, 오랜만에 갓김치까지. 값이 얼마라도 상관없으니 사람 하나 살린다 생각하고 제발 팔아달라는 말씀을 하시다니. 누군가의 오래된 추억을 음식으로 대신해드릴 수 있어 무척이나 새롭고 놀라운 경험이다. 추억은 돈으로도 못 사는 건데.
사진 출처: 본인 제공
아 그래서 해물보쌈김치가 무엇이냐 하신다면.
이북식 황해도 전통 김치다. 배춧잎 속에 낙지, 전복, 굴 갖가지 싱싱한 생 해물과 과일, 밤, 잣 등이 푸짐하게 들어있는 아주 귀하고 고급스러운 김치. 엄마는 감히 '김치계의 왕'이라 칭하고 싶다 한다. 그럴만하다, 비싸고 귀한 식재료가 김치 안에 다 들어있다. 드실 때는 배춧잎을 살살 펼치고 김치 소를 드시면 된다. 보기에도 예쁘고 일반적으로 쉽게 볼 수 있는 스타일의 김치가 아니라 특별함도 있다. 푹 익혀먹는 김치는 아니고, 살짝 익히거나 생 김치처럼 바로 담아 드셔도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