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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rayura Jul 25. 2018

어설프게 만화가를 꿈꾸는 직장인 5

바깥 바람, 양지도 음지도 아니지만. (부제: 페북의함정)

시험과 시험을 넘어, 드듸어, 직장인이 되었다. 첫 3~4 년 동안에는 직장이라 하기보다는 합숙훈련소에 가까워, 집에 (곧, 나의 아늑한 방구석 작업실에) 들어올 수 있는 날은 좀처럼 없었다. 졸업 전에는 존재감조차 없던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의 중요성이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박히는 것 보다 커지고, 어쩌다가 가끔 잡는 연필은 좀처럼 매끄럽게 굴러가는 일이 없었다. 만화를 그리는 것에 대한 미련은 남았지만 만화가가 된다는 것은 거의 마음을 접었고, 그저 남 몰래 하는 취미 생활 정도로 유지되겠지-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저마다의 생명과 저마다의 세계를 가지게 된 나의 이야기들은, 내가 여유 없음을 이유로 없애거나 버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스스로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똘끼가 (좋게 말해서 '창작력'이) 일과 생활에 치어 사그라져버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그런 것을 걱정할 시간도 쉽게 나지 않았다. 그저, 내 안에 있는 것들은 쉽게 사라져버리진 않을 거라고, 언젠가 다시 갈고 닦으면 반짝반짝해질 거라고 스스로를 얼러줄 수 밖에 없었다.

2010년, 직장인 4년차 때의 그림. 비싼 잉크를 마음껏 처바르며 멋져보이려고 용은 썼지만 어딘가 상당히 어색한 느낌 (심지어 대칭도 안 맞음). 

직장인이 되어 유일한 장점은 내가 경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학생 때에 동년배들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용돈을 받고 있던 나는, 과외 수업을 통한 부정기적인 수입을 모아 여행을 가거나 악기를 사거나 할 수는 있었지만, 이 몰래한 사랑에 많은 돈을 투자할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 정기적으로 내가 평생(!) 만져보지 못했던 목돈이 통장에 다달이 들어오며,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도 없고, 재테크에는 물론 관심도 없고, 어마마마께선 소액의 정기 적금 외에는 나의 월급에 관여치 않으셨으니 이 경제 개념 없는 철부지 직딩에게 부족한 것은 '시간'이지 '돈'이 아니었다. (학생 관점에서는 나름 고가였던) 색연필, (역시 나름 고가의) 잉크, (연필이나 샤프로 끄적거리는 것이 고작인 주제에) 고급 종이로 만든 비싼 스케치북... 만화를 그리지 못하는 것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나는 학생 때엔 마음껏 사지 못했던 이런저런 것들을 사다가 방구석에 쟁여두었다. 이 소심한 돈지랄 중에, 직장에서의 연차가 쌓이면서 늘어난 시간 여유와 함께 다시 내게 만화를 그릴 수 있게 해준 일등공신은 까맣고 네모나고 납작한 기계 - 와콤의 타블렛이었다.

'갈라지지 않는 펜촉과 긁히지 않는 종이, 번지지 않는 잉크'. 코믹스튜디오 소프트웨어로 그림을 그리고는 코멘트를 덧붙여둔 2013년 1월의 그림.

그리고 변함 없이, 나의 대변자로서 대외 활동을 도맡아준 녀석-해파리 캐릭터 또한 타블렛의 도움을 받아 되살아났다. 더구나, 동그라미 하나에 직선 네 개, 동그라미 안에 적당히 점과 선으로 표정만 그려넣으면 완성되는 이 친절한 캐릭터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탄생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녀석은 하드디스크의 '낙서' 폴더에 고이 저장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웹 상에 데뷔하기에 이른다. 마침 그 즈음은 내가 페이스북을 시작하던 때였다. 한참 페이스북에 이런 저런 사진이니 신변잡기니 닥치는대로 올리고 '좋아요'를 받는 재미에 빠져있던 나는, 타블렛으로 그린 해파리를 '좋아요' 전쟁의 선봉으로 내세우게 된다.

타블렛으로 그려 페이스북에 처음으로 올린 해파리 만화. 뭐, 만화라고 보기엔 좀 무리가 있지만.

순간 순간의 느낌이나 주변 일들을 나 대신 얘기하게 하는 것에서, 진지하게 나 자신을 반성하고 질책하는 것까지. 말주변이 부족하고 뭘 해도 어설픈 '나'를 대신해 '해파리'는 소소한 이야기를 지껄이고, 답답한 속내를 하소연하고, 무거운 기분을 덜어내고, 많은 위로와 공감을 얻어냈다. 드문드문 연락하는 친구들이나 직장에서 어쩌다 마주치는 지인들이 오랜만의 안부 인사와 함께 '만화 잘 보고 있다'는 얘기를 하면 힘이 나고, 간간히 '진지하게 웹툰 진출을 추진해보라'고 응원해주는 친구도 있었다. 이러한 성원이 힘입어, 나도 나의 만화를 좀 더 넓은 세상에 풀어놓아도 되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가볍고 쉽게 공감할 수 있을만한 캐릭터를 내세워 인지도를 얻고 난 후엔, 진지하게 내 만화를 그려 사람들에게 내보일 수 있겠다 싶은 계산을 하기에 이르렀다.

해파리 만화를 통해 공감과 응원은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단, 내가 아는 사람 한정으로.

그런데 내가 올리는 페이스북 만화엔 미처 예상하지 못한 함정이 있었다. 하나는, 내 해파리 만화를 좋아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아는 사람들이며, 나와 비슷한 환경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직업이며, 최소한 내가 어떠한 성향의 사람인지 알고 있는 페이스북 친구들이 '맞아 맞아' 하고 우쭈쭈 해주는 것에 너무 쉽게 도취되어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걸림돌은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뻗어나가는 페이스북 친구 연결이었다. 결국 나의 직장 동료 뿐만 아니라 상사까지 페이스북 친구로 연결되며, 우울과 자괴로 가득한 만화에 상사님의 '좋아요'가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묘한 긴장감과 압박감이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교수님에게 '좋아요'를 받고 식은땀이 흘렀던 어느 날의 그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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