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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Aug 31. 2020

산티아고 순례길 - 작은 것이 주는 행복

6월 18일 - 리바디소(Rivadiso)

갈리시아의 우거진 숲길을 걷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쭈욱 뻗은 가지와 푸르른 이파리.
그 사이로 보이는 티 없이 맑은 하늘.
왜 난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과 걱정을 사서 하느라 땅만 보고 걷는 걸까.
잠깐 고개를 들면 이토록 아름다운 하늘이 있는 것을.
그리고 생각해본다.
나중을 걱정하느라 지금의 행복을 놓치지 말자.
나중에 행복하자고 오늘을 불행하게 보내지 말자.
오늘 행복해야 내일도 행복하리니.

여유 있는 출발.


이제 겨우 3일이 남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여유일까. 100명이 넘는 순례자를 수용할 수 있는 알베르게에 고작 7명만이 묵은 날의 출발에서 오는 여유일까. 우린 여유롭게 일어나 빵과 우유로 가볍게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천천히 길을 나섰다.

한 걸음, 한 걸음 한층 가벼워진 가방과 발걸음. 어제와 마찬가지로 우리 대화의 주제는 ‘미래’ 그리고 ‘현실’.

조금은 답답해진 마음과 막막함이 함께였지만 그래도 걷는 것은 한결 여유롭고 가벼웠다.


그리고 어느새 도착한 멜리데(Melide).


멜리데는 문어요리가 유명한 도시다. 문어요리에 대한 기대감이 한층 오른 12시. 우린 맛집이라고 알려져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빵빵한 와이파이와 맛있는 뽈뽀(Pulpo, 문어요리)와 스테이크. 그리고 와인과 마티니까지…….

멜리데의 문어요리 전문 식당에서 즐긴 만찬.

평소라면 30분이면 끝이 났을 식사시간은 한 시간을 훌쩍 지났고 몸도 마음도 풀려버렸다.


그래서일까.


동행인은 이미 반쯤은 지쳐버린 듯했다. 나는 기분이 좋고 힘이 나면서 즐겁기만 한데, 동행인은 20㎞가 넘어서자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면서 걷지를 못할 지경이었다.


겨우겨우 힘을 내서 강가에 위치한 공립 알베르게에 갔는데,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No Cama."


빈자리가 없다. 근처에 있는 사립 알베르게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여유를 부린 것이 화근이었다. 전날의 넉넉했던 알베르게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일찍 도착한 다른 순례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크지 않은 마을인 리바디소에는 알베르게가 많지 않았다. 가장 규모가 큰 공립 알베르게가 만석인 데다 근처 사립마저 만석이라니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미 4시를 지나 5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 상황. 까미노에서 노숙을 할 수는 없었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갈 수는 없으니 꼼짝없이 다음 마을까지 걸어가야 할 수도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마을 끝자락에 위치한 알베르게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와이파이나 주방, 시설과 같은 세세한 조건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저 빈 침대, 내 한 몸을 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 전부를 얻은 것처럼 행복해졌다.


다시 한번 깨닫는다.


행복이란 멀리 있지 않다. 이렇게 소소한 것에도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욕심을 부리며 스스로를 불행으로 몰아세워 왔을까.


까미노는 이렇게 가르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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