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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Aug 28. 2020

산티아고 순례길 - 마음에 붙이는 반창고

6월 17일 - 빨라스 데 레이(Palas de Rei)

산티아고가 가까워지는 만큼 끝나가는 신혼여행이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결혼이라는 중요한 약속을 한 지 딱 한 달.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여정. 나는 작은 불안감과 걱정을 토로했고 조금은 장난스러웠던 어제들과 달리 오늘은 조금은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사실 우리에게 결혼이란 아득하니 먼 이야기일 것만 같았다. 언젠가 자연스럽게 하게 되겠지만,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싶었다. 그랬던 결혼을 하고나니, 역시나 우리에게 그런 순이 올까 싶은 출산과 육아도 곧 닥칠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뽀르또마린에서 내려다보는 전경. 주변에 흐르는 강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 겨우 68㎞. 멀기만 했던 산티아고가 가까워질수록, 산티아고와의 만남만큼 산티아고와의 이별도 준비해야함을 깨닫는다. 또한 현실로 돌아가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심도 깊은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기도 하다.


까미노는 인생의 축소판과도 같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은 인생에서 어느 지점일까? 아마도 세상과 이별을 준비하는 노년이지 않을까?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며 차후로 미뤘던 일들이 가까워져온다. 까미노도, 우리 인생도.


걷다 만난 한 상점에서 까미노의 다섯 가지 상징을 설명하는 브로슈어를 읽었다.


화살표, 배낭, 반창고, 지팡이, 가리비.


인생의 지표, 삶의 무게, 삶의 의미… 모두 각기 상징하는 바가 있고 깊은 뜻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반창고’였다.


반창고 : 연고나 붕대 따위를 피부에 붙이기 위하여, 점착성 물질을 발라서 만든 헝겊이나 테이프 따위.


까미노를 걷다보면 크고 작은 상처는 필연적이다. 걷다 생긴 물집, 넘어져 생채기, 배드버그에 물려 생긴 두드러기 등 안 생기면 다행이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생기니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산티아고 순례길 준비목록에는 구급약품, 그 중에서도 다양한 크기의 반창고가 꼭 들어간다.

처음 까미노를 걷기 시작했을 때, 나는 넘치는 열의를 주체하지 못하고 휴식의 필요성을 간과하고 넘어갔다. 이렇게 쌩쌩하고 기운이 넘치는데다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기분이 좋은데 굳이 쉴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러고 딱 3일 만에 고비가 찾아왔다. 발뒤꿈치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까미노에서 휴식이란 지친 다리와 어깨를 쉴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틈틈이 땀에 젖은 발을 말려 물집이 잡히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신이 나서 무작정 걷기만 했으니 발에 탈이 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살이 두꺼워 잘 낫지 않는 발뒤꿈치에 물집이라니. 자칫 잘못 치료했다가 덧날까, 그래서 까미노를 포기하게 될까 덜컥 겁이 났다.


걸을 때마다 찌르는 것만 같은 통증이 찾아왔다. 신발에 쓸리고 양말에 밀려 물집은 날이 갈수록 더 커져갔다. 그럼에도 치료를 미룬 것은 ‘그래도 잘 관리하면 자연적으로 나을 거야.’라는 안일한 낙관 때문이었다.


결국 발뒤꿈치가 갈라지고 찢어져 피가 나고서야 ‘적재적소의 치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찢어진 발뒤꿈치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데, 오스삐따에로(hospitalero, 알베르게 주인)가 황급히 다가왔다. 이렇게 하면 며칠 안가 더 심해진다며 알베르게에 비치되어 있는 구급약통을 가져오더니 치료를 도와주었다.

상처에 소독약을 뿌리고 연고를 바른 후 커다란 반창고로 상처를 감쌌다. 큼지막한 반창고가 ‘이제 괜찮아, 금방 나을 거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날 이후 나는 조그마한 상처라도 그때그때 치료하고 곧장 반창고를 찾아 붙였다. 당장은 괜찮아보일지 몰라도 방치했다가 곪아 더 큰 상처가 된다는 것을 직접 체험하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는 비단 까미노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로 다치기도 하고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긴다. 몸에 남은 상처는 눈에 보이기라도 하지, 마음에 생긴 상처는 애써 잊어버리고 묵과하고 넘어가기 십상이다.

‘당장은 괜찮으니까.’ ‘살다보면 잊히겠지.’ ‘내가 너무 예민한거 아닐까.’


아니다. 그렇게 방치했다가는 상처가 덧나 병이 된다. 사소하고 작아보였던 상처가 결국 나 자신을 무릎 꿇리게 된다. 상처는, 아픔은 꼭 치료해야 한다. 마음의 상처에도 ‘반창고’를 붙여줘야 한다.


‘아직도 당신에게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있습니까?’


나는 어떤 상처가 있는가. 애써 외면하고 치료하지 않은 채 방치해 병으로 키우고 있는 상처는 없는지,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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