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구조가 이상한 탓에 조금만 걸어도 새끼발가락에 굳은살이 박이는데 결국 물집까지 생겼다. 평소라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곳은 까미노. 많게는 40㎞에서 적게는 25㎞씩 걸어야하는 곳이다.
유럽인들은 휴가가 길고 지리적으로 가까워 900㎞를 4년에서 5년 동안 나눠 걷는 경우가 많은데, 비싼 항공료와 큰 맘 먹고 오지 않으면 두 번 오기 힘든 한국인에게는 한 달 안에 주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을 준다.
물론 우리는 2개월 동안 느긋하게 걷기로 하고 많아야 25㎞씩만 걷고 있지만 그 마저도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20㎞씩 매일 걷다보면 어느새 적응도 되고 걷지 않는 것이 어색해질 것이니 이것도 잠깐이라고 의지를 다져본다.
아프고 불편하기는 했지만 목적지인 에스떼야(Estella)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서둘러서 땀을 씻고 물집을 치료했다. 아주 작은 물집이지만 ‘뭐 큰 일이야 나겠어?’하고 방치했다가는 아예 까미노를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 까미노에서 방심은 금물이다.
그리고 휴식시간.
낮이 길고 햇볕이 따가운 스페인에는 낮잠시간인 씨에시타(siesta) 문화가 있다. 이 시간에는 성당이며 상점이며 대부분 문을 닫는다. 처음 스페인에서 마주한 씨에스타는 불편함이었다. 성질급한 한국인에게 필요한 물건을 제때 살 수 없다는 것, 한창 구경하고 있는데 나가야 하는 것은 어색하고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까미노에서 씨에스타는 필수불가결하다.
앞서 말했듯이 스페인은 낮이 길고 햇볕이 뜨겁다 못해 따가울 지경이라 아침에 출발을 하면 얼마 못가 더위에 허덕이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해가 뜨기 한참 전인 새벽 6시쯤 출발을 한다. 나도 처음에는 느긋하게 아침을 챙겨먹고 출발했다가 11시부터 그늘을 찾아 헤맸던 기억이 있어 그 다음부터는 새벽부터 짐을 꾸렸다.
새벽 6시에 출발하게 되면 아무리 발이 느린 사람이라도 1시쯤이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새벽에 일어난데다 오래 걸어 피곤한 순례자에게는 씨에스타는 황금과도 같은 선물이다.
샤워를 하고 땀에 흠뻑 젖은 옷을 빨아놓고 잠깐의 낮잠을 즐긴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상이다. 짧은 낮잠이 삶의 질을 얼마나 풍족하게 하는지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
별이라는 뜻의 에스떼야는 말 그대로 별을 닮은 마을이다. 까미노에서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도시 중 하나인데, 볼거리가 많아 산책 겸 관광을 하기에 좋았다. 다양한 박물관이 있고 넓은 공원과 역사가 오래된 성당들이 많아 그냥 지나치면 두고두고 아쉬운 곳이다.
1년 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축제기간이었는데, 노점에 열린 장에서 가죽으로 만든 동전 지갑 하나를 구입한 기억이 났다. 축제기간에 대도시를 지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기회인데, 까미노 초반이라 예산을 생각하느라 사지 못하고 지나간 것이 두고두고 후회되고는 했다.
까미노의 한 바르(bar) 메뉴판. 순례자메뉴는 양이 많고 맛도 괜찮지만 10유로를 매일 지불하기란 쉽지 않다.
씨에스타가 끝나고 장을 봐왔다. 식당에서 순례자메뉴를 사먹는 것도 좋지만 1인당 10€를 매일 지출한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맛있고 푸짐한 순례자메뉴는 다음으로 미뤄두고 모처럼 솜씨를 발휘해 요리를 해보았다.
요리라고는 김치찌개가 전부였지만 이젠 제법 레파토리가 늘어난 나는 파스타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곁들이는 맥주 한 캔이 제일 맛있었던 것은 왜일까? 음식이 맛이 없어서이기보다는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모처럼 신혼여행다운 기분을 만끽했기 때문이라고 위로해본다.
빰쁠로나부터 뿌엔떼 라 레이나 그리고 에스떼야까지. 1년 전에는 머물지 않고 지나쳐갔던 곳들이다. 몸이 조금 힘들어도 다음 마을까지 가거나 얼마 걷지 않아 애매하지만 그 직전 마을에 머무르는 식으로 애써 큰 마을을 피해다녔다. 왠지 호젓한 곳에 머무르고 싶기도 했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에는 작은 마을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지간하면 큰 마을에서(특히 책에서 추천하는 지점)에서 머무르고 있다. 1년 전과 겹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함께 돌아다니며 구경하기에는 큰 마을이 좋아서다.
덕분에 한국인(그것도 몇 번 만났던)들을 만날 기회가 자꾸 생긴다. 해외여행을 하면서 한국인을 이렇게 자주 만나다니. 까미노를 걷는 한국인이 많다는 말은 들었지만 어딜가나 한국말이 들리니 반가움을 넘어 놀랍기까지 하다.
까미노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반갑고 대화가 돼서 좋다. 성향이 비슷한 사람이라면 마치 10년 전부터 알아왔던 사람처럼 친해질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장점만큼 단점들도 명확하다. 외국인들과의 교류는 적어지고 빠르게 걷는 한국인들의 속도에 맞추다보니 좀 무리해서 걷게 된다는 것이다.
1년 전에는 가이드책에서 지정한 목적지(가이드책은 알베르게가 많은 대도시를 목적지로 설정해둘 경우가 많다.)가 아닌 마음에 드는 작은 마을에서 머물렀던 탓에 한국인을 만나기가 힘들어 가끔 만나면 좋기만 했는데, 이번에는 큰 도시에 머무르니 그때의 자유로움과 재미를 느끼기는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