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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Jul 07. 2020

산티아고 순례길 -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서 오는 편안함

5월 23일 - 뿌엔떼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초록을 걷는다.
돌부리를 걷어차며
구름을 등진 채로
무거운 걸음 떼
어지러운 마음을 움직여
초록을 걷는다.
반가운 손짓과
쉴 곳을 내어주는 친절함에
쉬이 마음을 내어주지 않던
방랑자도 초록을 걷는다.
노래하는 바람을 따라
지나가는 봄을 스쳐
그렇게 초록을 걷는다.
초록이 노래한다.
어여오라
어서오라
초록의 노래에
난 오늘도 초록을 걷는다.


까미노 첫 날.

빰쁠로나를 가로질러 약 네 개의 마을을 지났다. 화해의 고개라는 빼르돈(Alto del Perdon)를 넘고 자갈길, 가파른 내리막길을 연달아 걸으니 다리가 아프고 발도 저리기 시작한다. 역시 까미노 첫 날은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나보다. 아직 체력은 괜찮지만 오래 걷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보니 힘이 든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잔뜩 낀 먹구름이 괜한 근심을 불러일으킨다. 맑고 더울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벗어났고 매서운 바람이 외투를 뚫고 살을 엔다. 오들오들 떨다가도 한참을 걷다보면 땀이 나고 추위는 느껴지지도 않지만 발을 쉬게 하기 위해 잠깐 짐을 풀고 자리에 앉아 쉬고 나면 다시금 추위가 가까워진다.


초여름에 들어섰음에도 날씨는 서늘하고 바람은 거세다.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 어둡기만 하다. 혹시라도 비가 내린다면 아마도 한동안은 강행군이 될 것이고 고된 길에서 즐거움보단 짜증과 한탄이 먼저 나올 것이 분명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런 현실 속에 난 혼자가 아니고 둘이며, 동행인은 그저 아는 사람 또는 우연히 만난 사람, 언제든 헤어져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정말 중요한 문제다.


힘들고 버리고 싶어도 난 이 사람과 맞잡은 손을 놓아서는 안 되고 끝까지 가야 한다. 힘이 들면 같이 쉬어갈 수 있다. 게다가 함께 수다를 떨면서 걸으니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즐겁다는 생각이 우선이다. 첫 해외여행에 들떠 보이는 남편의 모습에 나도 절로 행복해진다. 평소에는 과묵하고 말주변이 없어서 수다와는 거리가 있었던 사람이 자기가 먼저 말을 걸고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나서는 것이 새롭게 느껴진다.


부디 날씨가 서늘하거나 추운 것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비는 내리지 않기를 바라본다.


무더위를 만난 후 맞는 비라면 반갑기라도 하고 또 다른 즐거움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걷기 시작한지 단 하루, 지난 일주일 내내 서늘한 날씨만 계속되었기 때문에 비는 그저 고난과 역경이란 이름으로 다가올 뿐이니까.

왕비의 다리라는 뜻의 뿌엔데 라 레이나.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햇살을 즐기는 여유로운 낮은 평화 그 자체였다.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고 무사히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유럽, 아니 스페인의 오후 3시는 고요하고 호젓하고 여유롭다. 느긋하게 씻고 나와 동네를 한 바퀴 돌자면 따뜻한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강 가의 벤치엔 낮의 따뜻한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이, 공원의 광장엔 아이를 대동한 부부가. 그렇게 모두 봄의 여유를, 따스함을 즐기고 있다.


하루하루가 바쁘고 휴식이라도 취할라 치면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 쫓기듯이 살아왔던 나의 지난날들이 오버랩된다.


“우리도 이렇게 여유롭게 살면 좋겠다.”


별 것 아닌 말이지만 꽤나 어려운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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