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발가락에 생긴 물집 때문에 걷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걷다 보면 어느새 익숙하다는 듯이 걷게 되니,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닌 것 같다.
까미노를 걷는 내내 우리는 되도록 음악을 듣지 않았다. 특히 아침에는 맑은 마음으로 귀를 열어두려 노력했다. 이유는 다름 아닌 자연의 소리 때문이다.
새벽이슬을 맞으며 걷는 길에는 무수히 많은 소리가 들린다. 자박자박 풀 밟는 소리, 아침을 알리는 새 지저귀는 소리, 간간이 들리는 물 흐르는 소리, 나뭇잎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까지. 자연의 소리 모두가 음악이 되어주었다.
소리에 귀 기울이며 걷다가 혼자 감동해 카메라를 켜지만 눈과 마음으로 보는 것이 다 담기지 않아 아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에스떼야부터 로스 아르고스까지의 구간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힘이 들었다. 10㎏의 배낭을 하나씩 들쳐 매고 25㎞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배낭 덕에 몸은 무거워졌고 발에 생긴 물집도 말썽이다.
그럼에도 위안이 되는 선물이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이라체 수도원(Bodegas Irache)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포도주의 샘이 있기 때문이다. 두 개의 수도꼭지가 있는데 하나는 물이 나오고 다른 하나에서는 이라체 와인이 나온다. 순례자들은 가져온 컵이나 물통에 와인을 담아 마시는데, 더위에 지친 순례자들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인 것이다.
이곳에서 만난 한 순례자(오스트리아에서 왔다고 했다.)는 와인을 많이 마신 탓에 취해서 주사를 부리다가 결국에는 벤치에 누워 잠을 자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는 콸콸 나오지만 와인이 나오는 수도꼭지는 졸졸 흐르듯 조금씩 나온다. 까미노를 걷는데 필요한 힘을 보충하기 위해서만 마시라는 의미일 것이다.
두 개의 수도꼭지가 있는데, 하나에서는 물이 나오고 하나에서는 향긋한 와인이 나온다.
이라체에서 와인을 마시고 다시 까미노를 걷는다. 게다가 로스 아르고스까지의 길에는 그늘 하나 없고 마을은 찾아볼 수 없다. 보리밭과 밀밭만을 배경으로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걸어야만 한다.
쭉 뻗은 까미노 위에는 우리 밖에 없다. 아름다운 풍경 사이로 우리의 걸음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괜찮다, 금방이다 생각하며 맞잡은 손을 놓지 않고 계속 걷는다. 그래도 아직 6킬로미터가 남았다니, 잠시 쉬어갈 그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힘든 만큼 마을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도 커진다.
“마을이다.”
우리는 동시에 외쳤다.
“환타. 환타가 먹고 싶어. 차가운 환타.”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무거운 배낭은 내려놓고 신발도 벗어놓고 시원한 물에 샤워를 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하게 됐을 때, 우리는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원한 물 한 잔, 지친 발을 쉴 수 있는 나무 그늘, 순례자들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에 행복해하는 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