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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Jul 18. 2020

산티아고 순례길 - 무심코 흘려보낸 시간에 대한 아쉬움

5월 27일 - 나바레떼(Navarrete)

매일 21~22㎞씩 걷고 있다. 가이드 책에서는 로스 아르고스(Los Argos)부터 로그로뇨(Logroño)까지를 한 구간으로 설정해놓았지만, 우리는 그 앞인 비아나(Viana)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대도시인 로그로뇨는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나바라(Navarra) 지방을 벗어나 리오하(La Rioja) 지방으로 오게 되는 시점인 로그로뇨.

로그로뇨는 대도시인만큼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대성당도 많고 대학교, 와인농장, 공원, 쇼핑몰 등 관광지부터 편의시설까지 없는 것이 없다. 그런 곳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움이 많았다. 그렇다고 여기에 머무르기도 애매했다. 비아나에서 로그로뇨는 기껏해야 9㎞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관광 겸 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산티아고 성당(Iglesia de Santiago el Real), 산타마리아 대성당(Santa María de Palacio) 등을 돌아보고 자연사박물관과 시청, 로그로뇨 알베르게까지 다녀오니 로그로뇨에서 벗어나는데만 3시간이 걸렸다.

까미노를 걸을 때는 시간 분배가 중요하다. 너무 늦게 도착하면 알베르게가 만석이 될 수도 있고 늦장을 부렸다가는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번 일정은 후자에 해당했다. 로그로뇨에서 시간을 지체하면서 애초에 머무르기로 했던 벤또사(Ventosa)까지는 가지 못했는데 시간은 이미 4시. 결국 목적지를 수정해 나바레떼(Navarrete)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다.

로그로뇨를 벗어나는 길은 아름다운 풍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따스한 햇살과 드넓은 들판, 향기 가득한 꽃이 아니라 삭막한 공장지대가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한국과는 다른 풍경이지만 공장지대의 삭막함을 만나면 재미는 그대로 반감이 된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 아름답고 멋진 자연이 보고 싶어 진다.     


No Corras, que donde tienes que tener de a ti mismo.
(뛰지 마라, 네가 가야 할 곳은 결국 바로 너 자신이다.)

말썽을 부리던 새끼발가락이 어느덧 안정권에 들어섰는지 조금은 괜찮은 느낌이다. 걷는다는 것이 쉬이 적응이 되지 않는다. 딱딱한 등산화를 신고 먼 거리를 쉬지 않고 걷는 것에 적응할 때쯤이면 산티아고에 도착해 있을지도 모른다.


혼자였다면 털어놓을 곳이라고는 나 자신뿐이니 참고 걸을 수밖에 없으니 말없이 감내하고 말았을 텐데, 곁에 의지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인지 알게 모르게 투정과 불평이 는 것 같았다.


그래도 유쾌하게, 즐겁게 걸으려고 노력하지만 계속해서 이런 식이면 곤란하겠지. 이제 겨우 5일이 되었을 뿐이고 앞으로도 600㎞ 가량이 남았으니 말이다.

까미노를 걷다 보면 하루가 참 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음 날을 위해 9시쯤 잠을 자는데, 6시에 일어난다면 9시간을 자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루가 길게 느껴진다. 걷고, 보고, 느끼는데 온전히 집중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까미노를 걷기 전에는 내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출근을 하면서 퇴근을 생각했고, 퇴근하고 나면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 금방 잘 시간이 되곤 했다.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무의미하게 흘러간 시간이 아쉽기만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고 알차게 보내고 싶어 진다. 딱히 하는 것 없이 와인 한 잔을 마시며 하늘을 보는 것이 전부일지라도 그 순간이 무척이나 소중하게 다가온다.


시간의 소중함.

오늘도 까미노는 내게 가르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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