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프라의 공립 알베르게는 2인 1실로 1층 침대가 2개인 방이다. 사립 알베르게에 비해 공립 알베르게는 4인실 이상의 다인실이 대부분이다. 뻥 뚫린 곳에서 무차별적으로 노출되기 때문에 샤워를 하거나 외출을 할 때면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전에 현금을 모두 도난당해 고초를 겪었다는 한국인 순례자를 만난 적이 있다.
걷는 내내 만난 두 명의 외국인 순례자들과 10인실에 알베르게에 머물렀다. 걷는 동안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보니 친해진 탓에 살짝 방심을 한 모양이었다. 배낭에 돈과 여권을 그대로 둔 채 샤워를 하러 다녀온 것이다. 그런데 웬걸. 샤워를 하고 돌아오니 배낭은 샅샅이 풀어헤쳐져있고 함께 왔던 외국인 순례자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알고 보니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가짜 배낭을 메고 순례자 행세를 하며 알베르게에 머무르는 순례자들의 돈을 훔치는 좀도둑이 꽤 된다고 한다.
다인실은 저렴하고 다른 순례자들과 금세 친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보안에 취약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벤또사(Ventosa)에서 만난 무지개
그렇기에 아소프라의 2인 1실 알베르게는 저렴하면서도 모처럼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1석 2조의 알베르게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곳에는 넓은 수영장(수심은 깊지 않다.)이 있어서, 오래 걸어 지친 발을 물에 담그고 휴식을 취할 수 있어 까미노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한다. 휴양지에 놀러와 있는 기분이랄까.
오후 2시.
일찌감치 짐을 풀고 수영장에 발을 담갔다.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마시며 햇살을 즐기면서 오늘 지나온 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평소보다 무겁게 눌러오는 배낭의 무게와 느려져만 가는 발걸음. 초반의 기세가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반복되는 풍경에 새로움이 없어서일까. 아소프라(Azofra)에서 산티아고(Santiago)까지 남은 거리 대략 580㎞. 어느새 100㎞ 이상 걸었다.
남은 거리만 두고 보면 아직도 까마득하고 멀게만 느껴지지만 이미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무탈하게 100㎞를 걸었다는 것은 꽤 기분 좋은 성취인 것이다.
2014년, 직장을 그만두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전.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다고 말했을 때, 주변인들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뉘었다.
첫 해외여행에 대한 걱정.
“여자 혼자 도보여행이라니, 너무 위험하지 않아?”
용기에 대한 응원.
“대단하다. 나는 생각도 못해봤던 일인데.”
그리고 노골적인 비웃음.
“네가 900㎞를 걷는다고?”
생장에서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까지 900㎞가 넘는 대장정을 약 30일 동안 걷는 여정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평소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던 터라 일견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불가능을 전제로 한 비웃음이 마치 내 의지를 무시하는 것으로 느껴져 기분이 퍽 상했었다.
나 역시도 반신반의했던 것이 사실이다. 살아오면서 그럴듯한 성취를 이룬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다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다른 사람 입을 통해 의심하는 말을 들으면 오기가 생긴다.
‘내가 왜? 내가 못할 것 같아?’
까미노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곳이다
그렇게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고 돌아가는 길에서 나는 마치 세상 전부를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지금껏 뭔가 하나를 제대로 끝까지 해본 기억이 별로 없었던 나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은 ‘나도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다가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