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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Jul 16. 2020

산티아고 순례길 - 까미노가 주는 선물

5월 26일 - 비아나(Viana)

로그로뇨까지 걸어볼 요량이었지만 늦게 출발한 탓이기도 하고 발에 생긴 물집 탓이기도 하고 힘들어서 걸음을 멈추었다.


까미노에서 5일, 걷기 시작한지 4일.


익숙해질만도 하건만 좀처럼 쉽지 않은 까미노다. 쉽사리 마음을 내놓지 않고,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길이기에 조금 더 힘을 내어본다.

이미 한 번 본 풍경이기에 익숙한 느낌도 있고 또렷이 기억나면서 반가워지는 장소도 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매번 새롭고 또 다른 감동을 준다. 어제 본 것 같으면서도 처음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물론 곁에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달라서이기도 하겠지만, 까미노라는 길이 주는 특별함이 가장 클 듯싶다.


함께 걷고, 함께 쉬고, 음식을 나눠먹고, 할 일을 나눠한다. 까미노 길 위에서 우리는 혼자이면서도 둘이고, 따로 이면서도 하나가 된다.


9년 동안 만났지만 그때보다 이곳 까미노에서 더 많은 것을 주고받고 추억하는 것 같다. 아마도 평소에는 익숙함에 속아 소홀해져있었지만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 덩그러니 남아있으려니 관계가 더 끈끈해지는 것 같다.

여전히 날씨가 좋지 않다. 바람은 거세고 먹구름이 잔뜩 이다. 햇살보기는 좀처럼 쉽지 않아서 초여름, 늦봄의 날씨는 온데간데없이 ‘춥다’는 말이 입에 붙어 있다. 더위도 더위 나름대로 힘들지만 마땅한 외투하나 없이 맞는 추위는 말 그대로 힘들다.


이보다 고될까 싶기도 하지만, 맞잡은 손을 타고 전해오는 따뜻한 마음과 온기로 버텨낸다. 앞으로 살아가는 것도 이와 같기를…….


작년에는 ‘제법 큰 마을이네.’라고 생각만 하고 지나쳤던 비아나. 올해는 어쩌다보니 머물게 되었지만, 우연히 성당에서 미사를 들을 수 있었고 순례자들을 위한 축복의 시간도 있어서 무사와 까미노의 가르침에 대한 기도를 받을 수 있었다.


가톨릭은 아니지만 미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어김없이 성당에 가고는 했는데,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와 가톨릭 국가의 오래된 역사가 함께하는 것이 꽤나 매력적이다.


모르고 지나칠 수 있었던 길. 조금은 안일한 생각으로 안전만 생각해도 중도 포기했다고 자책하기도 했지만, 특별한 시간과 소중한 만남이 함께하니 머무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미노에서 먹은 첫 순례자메뉴. 스프와 에피타이저, 본식, 후식까지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가격은 10유로.

까미노는 우연에 참 많은 선물을 주는 길이다.


늘 받기만 했던 내가 누군가에게 베풀고 돌려줄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기쁨을 안겨주기도 한다.


알베르게에서 한국인을 만났는데, 나처럼 여행 서적을 통해 까미노를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로 까미노를 걷고 계신 분이었다. 가이드 책을 보지 않고 기도를 하면서 걷다보니 까미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어려움이 많다고 하셨다.


1년 전에 걷고 또 다시 걷는다는 내 말에 이런 저런 것들을 물어오셨다. 사실 나도 책을 통해 알게 된 것 뿐이지만 까미노를 걷다보면 사소하지만 중요한(조리실, 와이파이가 있는 알베르게, 식당과 슈퍼가 있는 마을 같은 것 말이다.) 정보가 없으면 힘이 들 때가 있다.


어찌 보면 별거 아니고 물어보면 알려주는 것이 당연한데도 감사하다 말하고 소중하게 여겨주니 우연히 만든 만남에 행복으로 물드는 것은 순식간이라 생각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사소한 일도 소중해지도 특별해지는 곳. 이곳이 바로 까미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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