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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Sep 25. 2024

4. 모범생이 좋은 엄마

내가 잘 키우고 있다는 교만



딸은 시험 사건으로 학교에서 처음 조퇴를 했다.

불편한 일로 조퇴를 했지만 학교 밖을 나오니 딸은 편안해졌고 중간에 엄마와의 시간을 보내니 나름 좋았던 것 같다. 이때만 해도 아이의 조퇴를 한 번의 해프닝으로 넘겼고 다음 날 학교 가는 뒷모습을 보는데 대견했던 기억이 난다.

깊은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던 9월 중순..  학교에서 운동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우산으로 매스게임을 연습하는데 대형 바꾸는 게 힘들다며 딸은 투덜거렸다.

여행 중에 이미 매스게임 진도는 많이 나갔고, 딸은 눈치껏 아이들을 따라 했었다.

워낙 센스도 있고 눈치도 빠른 아이라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나는 아이가 너무 잘할 거라고 믿었다.


덜렁거리고 산만하게 보였던 큰아들과는 다르게 딸은 야무졌다.

4살이나 어린것이 오빠보다 야무지니 더 이뻐 보였다.

아들은 밖에 내놓으면 늘 불안했었는데, 딸은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냥 내가 그렇게 느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아들 손에 가면 새것도 바로 망가지거나, 놓고 다니거나 잃어버렸다.

학교 준비물도 스스로 잘 챙겨가 본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혼났다고 하면 네가 안 챙겼으니 어쩔 수 없다고 책임을 아들에게 돌렸다.

반면 딸아이는 바쁜 나를 쫓아다니며 내가 볼 때까지 코 앞으로 학교 가정통신문을 내놓으며 준비물이나 서류를 확실하게 챙겼다.

반면 아들 가방 속에는 내놓지 않고 지난 가정통신문 수장이 꾸깃꾸깃 박혀있었다.

그때는 왜 엄마에게 안 보여줬냐고 아이를 혼냈지만, 꺼내줘도 잘 보지 않았던 엄마에게 아들은 더 이상 통신문을 내놓을 이유가 없었던 것 같다.

바쁜 엄마를 너무 잘 알았기에 아들은 자기 선에서 모든 것을 정리했고, 그럼에도 딸은 학교에서 혼나고 지적받기 싫어서 어떻게는 나에게 자기를 위한 준비를 하게끔 했다.


딸이 그렇게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야무졌기에 학교 선생님들이 모두 예뻐해 주셨다.

3학년 담임선생님도 딸을 늘 칭찬해 주시며 야무지다고 선생님 가까이 두셨다.

선생님 책상 바로 앞에 앉히고 특권(엄마가 생각하기엔 특권이었고, 아이는 고통이었다.)을 주셨다. 

쉬는 시간에 선생님 책상 청소를 맡기셨고, 

다음 시간 교과서를 준비해 두도록 하셨고,

2교시가 끝나면 한약 드시라고 말씀드려야 했고, 

체육시간에 교실을 이동할 때는 딸에게 선생님 가방을 들게 하셨다. 

거의 비서 역할이었다.


딸은 어느 날부터 선생님이 자기한테만 일을 시킨다며 힘들다고 투덜거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선생님께서 너를 얼마나 예뻐하고 인정하면 그런 기회를 주시겠냐며 딸이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그런데, 딸은 나와는 달리 그 역할을 너무 부담스럽고 힘들어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학창 시절에 늘 있는지 없는지 몰랐던 소심하고 조용한 아이였기에 선생님 눈에 한 번이라도 띄어 심부름을 하는 게 대단한 영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이 특히 엄마가 학교에 다녀가고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나의 학교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절대 학교에 오시지 않았고 그 시절 담임선생님에게 다 주는 것 같았던 촌지 한 번을 주지 않았으니, 선생님에게 받고 싶은 사랑과 관심은 나에게 오지 않았다.

더구나 80년대에 강남 8 학군의 중심인 대치동에서 온 학창 시절을 보냈다.

사는 곳만 대치동이었지, 우리 집은 넉넉하지 못했기에 아빠가 받아오시는 월급을 한 푼이라도 아껴보려고 엄마는 온갖 노력을 다하시며 살림을 하셨다.

친구들이 받는 개인 과외는 꿈도 꾸지 못했고, 그때 당시에 반짝였던 일제 학용품은 그냥 부러울 뿐이었다.

한 반에 60명이 넘던 시절이니 조용하고 무난했던 나를 기억해 주는 선생님은 안 계시다는 것을 확신한다.

내가 선생님께 인정받고 싶어서 용기 냈던 유일한 일은 학기 초에 교실 커튼 빨아올 사람을 찾는데 내가 제일 먼저 번쩍 손을 들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나에게 교실 커튼을 빨아오도록 허락해 주셨고 선생님과 눈 맞춤만으로도 신나서 커튼을 집에 

들고 오면 엄마에게 엄청 혼났다.

커튼 빨기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엄마가 하는 일이었고, 나는 내가 눈에 한 번 띄어보겠다고 자진해서 

일이 엄마에게는 엄청난 노동을 안겨 드렸던 것이다.

그렇게 혼나도 몇 해는 그 커튼 빨아오기가 내 존재감을 알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실.. 경쟁자도 없었던 것 같다. 

커튼 빨아오기는 아무도 안 하고 싶었을 테니..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낸 나였기에, 딸이 학교에서 인정받고 칭찬받는 일은 마치 내가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딸을 모범생으로 잘 키우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딸이 힘들어하는 것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선생님께 감사드리기까지 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딸에게 선생님이 시키지 않아도 먼저 잘 챙겨드리라는 말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딸이 힘들다고 표현하는 일이 잦아지고 커졌지만, 나는 못 들은 척하며 한 학기를 보냈고 그런 딸이 자랑스러웠다. 아들은 선생님께 혼나는 일이 많았고 반성문을 쓰는 일도 잦았기에 딸은 두 배 세배의 보상이었다.

유치원에서 학부모들과 이야기 나눌 때에도 딸의 이야기가 더 앞섰던 것 같다.

함께 일하는 동료 교사들에게도 적극 딸을 활용하도록 하기도 했다.


참.. 이야기를 쓰다 보니 아이를 통해 내 보상심리가 어디까지 흘러갔었던가 깨닫게 되고 가슴 깊이 한탄스럽다. 아들과 비교하며 딸은 모범생으로 커주길 바랐고, 나의 간판이 되어 내가 아이를 잘 키우고 있다는 교만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 교만을 멈출 강력한 사건이 필요했다.


◆ 엄마의 생각하는 의자 ◆

    : 아이를 통해 흘러가고 있는 나의 모습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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