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무기 하나쯤은 있어야 하니까
새벽마다 주민센터에서 수영을 배운다. 이른 시간이고 동네에 있는 수영장이라 어르신이 대부분이다. 연휴가 길던 10월 초, 휴가 간 강사 대신 스물다섯 살의 젊은 강사가 일일 대타를 했다. 수업이 끝나고 탈의실에서는 한바탕 수다가 벌어졌다. 청춘인 선생님의 모습에 흐뭇했던 할머니들은 저마다 '스물다섯 살에 무엇을 했는지' 기억을 쏟아놓았다.
입담 좋은 정읍 할머니가 말했다.
스물다섯에 서울로 시집오니까, 9남매가 날 기다리고 있더라고. 그렇게 9남매 밥만 했어.
하루는 불을 때는데, 내가 불을 때본 적이 있어야지. 불 못 땐다고 시어머니가 야단인거야.
여자가 불을 못 때면 남자가 바람 난대나.
잘난 척하는 할머니가 끼어들었다.
아니, 왜 불을 못 때 봐? 우리는 다 나무로 불 때고 그랬잖아.
할매만 그랬지. 나는 정읍에서 잘 살았어. 그래서 연탄 썼지.
무슨 소리야? 그때 정읍이 얼마나 가난했는데. 연탄 구경이나 제대로 했겠어?
정읍 할머니는 발끈했다.
시방 왜이랴? 내가 서울 와서 명동 처음 가보고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명동에서 왜 놀라?
명동이랑 우리 정읍 시내랑 똑같아서 놀랐다!
이 이야기는 우리 엄마의 '웃음지뢰'다.
전주에서 나고 자란 엄마는 그 옛날 정읍이 어떤 곳이었는지 잘 알기 때문에 할머니의 허풍이 웃기다. 이 이야기를 듣고 엄마는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프다고 했다. 엄마는 그후로 만나는 사람마다 이 이야기를 하고는 기침이 나오도록 (혼자) 웃는다고 한다.
나의 웃음지뢰는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졌다. 여행 중 들린 작은 슈퍼에서 할아버지가 별안간 남편의 얼굴 쪽으로 돈을 던진 일이 있다. 알고보니 우리가 낸 돈이 위조지폐였던 것! 전날 파리의 근사한 브런치 카페에서 그 돈을 거슬러 받았는데 사기를 당한 거다. 잔뜩 화가 난 할아버지와 어리둥절한 우리.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지나고나니 이 일은 나의 웃음지뢰가 되어 언제든 웃음이 터진다.
'웃음' 뒤에 '지뢰'라는 단어를 붙여, '웃음지뢰'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누르면 터지고마는 지뢰의 특성을 이용해 언제든 웃음이 터져버리는 기억이나 이미지, 동영상 등을 가리킨다.
이 글을 쓰면서 친구에게 "네 웃음지뢰는 무엇이냐"고 물으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말해주면 되는 거냐'고 되묻는다. 행복했던 순간, 그것도 좋은 웃음지뢰다. 친구는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서 아르바이트하며 틈틈이 섬을 여행했던 한 달이 기억난다고 했다. 그때만 생각하면 늘 행복하고 미소가 흐른다고. 이 지뢰는 전파력이 세서, 나 역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는 재미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 그래서 언제든 웃음을 터뜨리게 할, 웃음 지뢰가 필요하다. 우리 삶에 이런 무기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