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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 Sep 17. 2020

이별에 대한 예의

"이별이란 종이 두장을 풀로 붙였다가, 억지로 떼어내는 것과 같다."

3년간 사귄 남자 친구가 있었다.


전 남자 친구는 나보다 3살 연상이었는데, 그와 나는 친구관계로 시작해 연인으로 발전한 경우였다. 친구 사이로 시작했기에 주변 친구들과도 서로 다 친한 사이였다. 나는 가장 친했던 남사친마저 그가 싫어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매정하게 연락을 끊어버리고, 3년간 한 번도 안 볼만큼 그 남자 친구를 아주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3년이라는 시간을 만나는 동안 남자 친구는 돈을 전혀 벌지 못했고, 데이트 비용의 100%는 전적으로 내가 부담했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니까 감수할 수 있었다. 사랑에 있어서 돈은 그저 더 많이 버는 사람이 내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만 3년이 되는 기념일 날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그는 나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나를 생각하면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고, 더 잘해줄 수가 없어서, 더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나를 위해서 이별하는 것이라고 했고, 나는 그런 그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후였나, 간신히 괜찮아졌을 때쯤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른 여자의 SNS에 태그가 되어있는 전 남자 친구의 모습을 캡처해서 나에게 보내준 것이다. 나와 헤어진 지 한 달 정도밖에 안되었는데, 다른 여자와 200일을 맞았다는 글을 보고 순간 멍해졌다. 그와 200일을 맞았다는 그의 새로운 여자 친구는 그에게 선물 받은 대형 꽃다발과 목걸이를 SNS에 자랑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헤어질 당시에 그가 나에게 솔직하게 “다른 여자가 생겼어,”라고 얘기해줬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렇게 내 시간과 감정을 배신당한 기분은 들지 않을 텐데.. 차라리 그랬더라면 당시에는 욕했을지언정, 시간이 흐른 지금쯤에는 어쩌면 쿨하게, 친구들과 모여서 술 한잔 할 수 있는 사이는 되지 않았을까.


그와 헤어지고 나서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내가 가장 안타까운 건 그와 내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 함께한 친구들과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없다는 점이다. 본의 아니게 우리의 공통된 지인들이 우리 둘의 관계 때문에 불편을 겪게 되어 너무나 미안하다.

 

내 전 남자 친구는 이별 앞에서 비겁했고, 겁쟁이였다.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나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고,

예의가 없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끝맺음이 가장 중요하단 말이 있는데, 나는 이 말은 연인 사이에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정말 상대를 사랑했다면, 이별 앞에서는 적어도 비겁하지 않아야 하는데……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본인이 상대에게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이별 앞에 이런저런 핑계, 이런저런 거짓말들을 늘어놓는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은 그게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인지 모르고.


“이별은 사랑했던 연인들은 마치 종이 두 장을 딱풀로 꼭 붙였다가, 억지로 떼어놓는 것과 같다,”라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딱풀로 붙여놓은 종이를 억지로 떼어내면, 억지로 뜯어낸 자국들이 각자 종이에 남게

된다. 이별을 한다고 해서 사랑했던 그 사람과의 시간들이, 추억들이 각자에게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서로 전혀 몰랐던 두 사람이, 어느 순간 가족보다도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이 연인 사이인데……

이별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있어서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아닌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이별 앞에서 비겁해지는 것일까?


내 인생에 있어서 소중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별 앞에서 더더욱 예의를 지키고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켜야 한다. 그것은 비단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분명 살면서 언젠가 내가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가 전 사랑들을 언젠간 뒤 돌아봤을 때, 찬란하게 사랑했던 그 순간순간들을 돌아봤을 때, 나 자신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한때 사랑했던 그 사람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좋은 사람’은 못되더라도, 적어도 비겁한 사람으로 남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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