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나를 구하지 않았다

by 이해림


그럴듯한 문장으로 시작하고 싶었지만,

그럴듯한 삶도, 그럴듯한 사랑도 없는 내게서

그럴듯한 문장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사랑은 나를 구하지 않았다.


제목을 쓰고 며칠째 노트북 모니터만 째려봤다.


뭘 쓸 수 있어 니가? 사랑을 논할 수 있어 니가?

지나간 나의 연인들이 본다면 기가 차 코웃음을 칠 게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눈을 크게 뜨고 봐줬으면 한다.

사랑은 나를 구했다가아닌,

사랑은 나를 구하지 않았다니까.

결국 나는 그 누구에게도 구해지지 못했으니까.


사랑만이 곧 구원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철이 없던 시절이라고 하기엔,

부끄럽지만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도

한 켠엔 그런 마음이 남아있음을 고백한다.


늘 불안정하던 삶에, 연인이라는 이름의 구원자가 나타나, 한 번에 내 삶을 이 쓰레기 장에서 꺼내줄 거라고 믿었던 그런 때가 있었다.


단순히 백마 탄 왕자를 기대했냐 묻는다면,

맹세코 그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다만 나의 수준에 '딱 맞는' 사람을 바랐을 뿐,

백마 탄 왕자님을 바랐던 건 정말 아니었으니까.

분명 나는 자기 객관화와 검열 수준이 높은

사람이기에, 그 정도의 남자는 만날 수 있으며

나를 이 시궁창에서 꺼내줄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한 해 한 해가 지나며, 나이를 먹어가는 일은

나의 바닥을 한 층씩 보는 괴로운 일이었다.

지하 2층이 끝인 줄 알았는데,

지하 43층이 있음을 깨닫는 일의 연속이었다.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높은 수준의 자기 객관화와 검열 수준은, 그저 나의 주관적인 평가에 그치지 않았음을 온몸으로 느껴가는 일의 연속이기도 했다.



자그마한 결혼 정보 회사의 매니저로 일했던 적이 있었다.


내 사업 아니 내 장사를 유지하기 위해서, 투잡, 쓰리잡이 필요한 때였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나름 호감상의 이미지 덕분에

경력이 없었음에도 바로 실전에 투입이 됐었다.


말 빨 하나는 자신 있으니

수없이 많은 소개팅으로 다져진 내공이 있으니

그렇게 아무런 자격증도, 아무런 경력도 없는 나는

겁도 없이 상담에 뛰어들었다.


한 명, 두 명

열 명, 스무 명.. 그렇게 많은 회원들을 거쳐갔다.


상담 시간 내내 땀을 흘리며 어색해하는 남자들부터,

본인 재력을 뽐내며 우쭐대는 남자들까지.

본인의 조건을 세세하게 설명하고 증명해 내야 하는

이 자리에서, 남자 회원들이 원하는 조건은 무서울 정도로 같았다.


성격 잘 맞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따위의

서두에 깔아 두는 조건들은 밑밥임을 어느 순간부터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밑밥이 어느 정도 두툼해지면 '예쁜 여자'라는 최종 결론을 꺼내든다.

연봉 2800의 남자도, 연봉 2억의 전문직 남자도

모두 결론이 같았다.


그때 내 마음속에서 슬며시 올라왔던,

쪽팔리고 짜치는 고백 하나 하자면

그래, 이렇게 남자들이 여자 조건보다 외모를 더 본다면, 결국 모두가 예쁜 여자를 찾는 거라면

나는 아무것도 가진 건 없지만 예쁘장하기는 하니까

사실은 내 맞춤 백마 탄 왕자도 있긴 한 거 아닐까?


아, 잠시만

고작 지하 7층 정도까지 떨어졌을 때의 마음이었으니,

지하 43층이 있다는 건 그때는 꿈에도 몰랐으니까.


'객관화가 안된 나이 든 여자'에 대한 인식을

충분히 안다.


어떤 이들은 유튜브나 온라인 세상에서나 혐오해 가며 떠드는 이야기라며,

다들 자기 짝이 다 있는 거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하기도 한다만, 나는 좋은 이야기보다 부정적인 이야기에 훨씬 더 많은 신경과 에너지를 쏟는 인간이라

사람들이 속으로는 모두 유튜브의 부정적인 댓글과 같이 생각할 거라고 믿어왔다.

그랬기에 나는 안간힘을 써서 나 스스로를 깎아내린다.


다른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내 점수를 매기기 전에

서둘러, ‘나이만 먹고 정신 못 차린 거죠 뭐' 라며

스스로를 비하하고 자조적인 개그를 해댄다.

그럼 사람들은 오히려 절절매며

'아니에요, 다 짝이 있는 거죠. 그 나이로 안 보이고 너무 예쁘신데'라는 말을 해주고

그 아무런 의미 없는,

그저 사회인이라면 할 법한 뻔한 대답에 값싼 위로를 얻는다.


왜 나는 끝까지 사랑받을 수 없었는지

왜 나는 누구에게도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없었는지

왜 나는 늘 상대에게 인정받아야만

가치 있는 삶이라고 느꼈는지

왜 나는


내가 나를 혐오할수록,

더욱더 간절하게 연인의 사랑에 매달렸다.

나의 불안을, 나의 초라함을, 나의 가난함을

연인을 통해 채우고자 했다.


그런 나의 영원히 메워지지 않는 구멍을 바라보며

허탈감에, 때론 분노에, 좌절감에 떠나갔던 연인들의 뒷모습이 여전히 선명하다.


사랑은 너를 구하지 않았어. 그래서?

여전히 객관화되지 않고 초 단위로 늙고 있는 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데?라고 묻는다면.

그럴싸하게 포장해 봤자,

여전히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사랑은 나를 구하지 않았고,

영원히 나를 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음을 깨달았다고.

누가 누구를 구원하는 일 따위는 생기지 않는다고.

그렇게 대답할 수 있겠다.


내가 나 스스로를 사랑해야 해, 타인이 아닌 오직 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어.

같은 뻔하고 지리멸렬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이제는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메우려 하지 않고, 구멍이 메워진다고 해서 그게 영원할 거라고 믿지도 않는다.


붙여도 붙여도 오징어 다리 하나에도 다시 떨어지는

내 치아 교정 유지 장치처럼.

한낱 그런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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