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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Jun 14. 2016

미용사와 기싸움

숏컷 실패기

기분이 못 생겨지기 시작하면 머리 모양을 바꾸면서 기분 전환을 노려본다. 

미용실을 다녀오면 이전보다 산뜻해지기 마련이지만

내 경우엔 이전보다 못나지는 경우가 많아서 사실 미용실이 무섭다.

무서운만큼 예뻐지고 싶은 마음도 크다는 것은 '미용실의 딜레마'.

실패를 줄이기 위해 원하는 머리 모양을 검색하며 많은 공을 들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결정적으로 송혜교 사진을 꺼낼 수 있는 뻔뻔함이 없다. 

비장하게 사진을 꺼낸다 해도 미용사가 사진과 나를 비교하며 얼굴을 찌푸리면

나는 이번에도 망했구나 싶은 마음에 그냥 삭발해달라 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어차피 망할 거면 반항이라도 하고 싶은, 이유 없고 순간적인 발광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로 여태껏 무난한 머리 모양으로 살아왔다.

언제나 독특하고 충격적인 스타일을 원하는데 어째서 미용사 앞에만 가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걸까.

미용사들은 귀밑 3센티의 똑 단발을 원하던 중학교 선생님들처럼 

내가 색다른 머리에 도전하는 것이 언짢은 모양이다. 

"이건 고데기예요"는 애교 수준이고, 

"이 기장으로는 안 돼요." "이 머릿결로는 안 돼요." 온갖 이유를 대며 나의 도전을 말리기 때문에

나는 이번에는 무슨 꾸중을 들을까 싶어서 아예 말도 안 꺼내게 된다.

그렇게 착한 손님으로 몇 년째 단발만 해오다가 

문득 죽기 전에 숏컷을 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갑자기 숏컷을 한 여자들이 예뻐 보이기 시작했고, 내 단발머리가 거추장스럽고 촌스럽게 느껴졌다. 

길게 생각하다가는 또 어영부영 끝날 것 같아서,

그날 아침 손끝을 부들부들 떨며 핸드폰에 숏컷 스타일의 모델 사진을 장전해가지고 미용실에 가게 됐다. 


마침 나를 맡게 된 미용사도 탈색한 숏컷 스타일이라서 마음이 한결 놓였다. 

적어도 숏컷 하겠다는 여자를 경멸스럽게 보지는 않겠군. 오늘은 미용실 운이 따르는가?

가느다란 흥분에 사진이 장전된 핸드폰을 쥔 손이 떨렸다.

벌써 목에 가운이 둘러지고 미용사가 내 머릿결에 무슨 딴지를 걸까 즐거운 고민을 하며 살피는 중이었다.

어떻게 자를 거냐는 물음에 나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처럼 숏컷을 해볼까 한다고 말했다.

그래. 어쩌면 저 미용사는 오랫동안 숏컷을 원하는 여자 손님을 기다려왔을지도 모른다.

매일 긴 머리를 야금야금 다듬기만 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당신도 숏컷이고, 나도 그걸 원해요. 무슨 마음인지 알죠?(씽긋)

약간의 공감을 바라며 미용사의 얼굴을 살폈는데, 거기엔 안타까움과 희미한 귀찮음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내 머리카락이 굵은 편이라 짧은 머리를 하면 뻗쳐서 관리도 어렵고 예쁘지도 않다는 말이었다.

숏컷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머리라 드라이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한번 자르면 기르기가 쉽지 않아 숏컷의 굴레에 빠진 가련한 여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게다가 내 얼굴형엔 숏컷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미용사는 잘라줄 수는 있지만 자기를 원망하게 될 게 걱정된다고 나를 말렸다.

결국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지겨운 짧은 단발머리가 되었다.

만팔천 원을 계산하고 미용실을 나오는데 서럽고 화가 났다.

기대했던 숏컷을 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그런가 싶었는데 

그것보다는 억울하고 한스러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처음에는 능력 없는 미용사를 미워하고 내 굵은 머리카락을 원망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화나 있는 대상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왜 나는 "다 필요 없고 숏컷을 해달라구요!"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진짜 숏컷이 하고 싶었다면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했는데

나는 나의 지병인 우유부단함, 나약함, 자기연민에 또 넘어가고 말았다.

나에게 지고 말았다는 것이 너무나 분하고 억울한 것이다.

내 자아가 강했다면, 뻗치고 안 어울리는 건 내가 감당할 테니 그냥 해주시오, 당당하게 말했을 텐데.


아니면 내가 숏컷을 진심으로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 의지가 정말 확고했다면 흔들리지 않았겠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 미용실에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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