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한다든가 퇴사를 한다든가
아니면 크게 아프고 난 다음이나 새해를 맞아 한 살 더 먹게 될 때,
눈앞이 깜깜해지고 미래가 막막해지는 '현자타임'이 온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혼자 고민하게 되는 묵직한 시간.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민하고 망설이는 인간.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모두가 그런 상태일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냐고 아무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은
그 답은 어느 누구에게도 미룰 수 없는 자기만의 짐이라는 걸 알아버려서다.
가족이라도 존재의 짐을 대신 들어줄 수는 없으니까.
어제 설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은사님을 만났고, 선생님 역시 고민하는 인간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잘 키운 큰아들을 장가보내는 과정에서
금전적인 갈등으로 아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고,
아내분 역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교직 은퇴와 시기가 맞물리면서 우울증 증상을 보인다고 했다.
나보다 두 배의 인생을 더 살아낸 인생 선배지만 인생의 각 단계에서 마주치는 고통은 늘 새로운가 보다.
먹고사는 문제를 지난 선생님의 다음 단계는 허무와 고독이었고, 나에게 해주고픈 말이 많아 보였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사뭇 비장했다. 선생님은 인생을 길게 봐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삶을 연명해야 하는 우리의 비천한 노년을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늙어서 어떻게 놀 수 있을지 지금부터 많은 총알(취미 같은)들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들이
나중에 나이 들어서는 요긴하게 쓰일지도 모른다고 귀띔하면서
선생님 본인은 젊었을 때 여자들을 꼬시려고 배워둔 기타 덕분에 마음이 든든하다고 한다.
기타는 큰 힘이 들지 않아서 오랫동안 칠 수 있을 거고,
동네 사람을 대상으로 한두 시간 기타 수업만 해줘도 굶어 죽지는 않을 거라는 나름의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내가 지금 팔십의 노인이라면 무엇을 즐기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나이 삼십까지 내가 만들어 둔 총알을 헤아리며 노년을 상상해본다.
우선 책 읽는 습관이 있다.
나는 책을 아주 좋아하고 욕심도 있다. 나이가 들면 책 읽는 시간이 많아질 거란 생각에 내심 기대되기도 한다.
혼자 읽는 것도 좋지만,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적당히 개인주의적이고 현명한 노인들을 모아서
가끔씩 모임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내가 직접 작은 책방 하나를 운영하는 상상도 해본다.
동네 사랑방처럼 노인들이 모여서 수다 떨고 커피를 마시는 곳이 되겠지만,
그 노인들의 대화가 속물적인 것보단 책을 바탕으로 하는 교양 있는 대화였으면 좋겠다.
책방 운영이 번거로우면 동네 문화센터에서 '책 읽기 토론'이나 '독후감 쓰기' 수업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난 어차피 꾸준히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니까 앞으로 50년 후면 누굴 가르칠 수준은 되겠지.
커피와 차를 좋아한다.
미각은 뛰어나지 않지만 정성이 들어간 차 맛을 구분할 줄 안다.
그리고 차의 맛과 가게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조화로운지 평가하는 나름의 취향이 있다.
가게 주인의 취향과 정성이 묻어나는 카페를 구별해서 사랑할 줄 알고
마음에 드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다도(茶道)를 좋아해서 경건하게 차를 마실 줄 알고, 아름다운 찻잔을 사랑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에서 맛있고 아름다운 찻집을 소개하는 '미슐랭' 같은 책자를 낼 수 있겠다.
차맛과 가게의 분위기, 주인의 태도 등을 모두 고려한 할머니의 까다로운 평가서.
왠지 믿음이 가지 않을까?
아니면 내 집에서 티모임을 만들어도 좋고, 직접 작은 티 카페를 운영해도 좋겠다.
사실은 그냥 혼자 책을 읽으며 티타임을 즐기는 나를 생각만 해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예술을 사랑한다.
이것도 나의 자랑스러운 특기 중 하나다.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나름의 감상평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술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조예가 깊지 않은 분야라도, 예술끼리는 어느 정도 통하는 구석이 있는지 대충 알아들을 수는 있다.
쉬운 예술은 친숙해서 좋고, 난해한 예술이면 난해해서 재밌다.
예술작품에 대해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나는 할머니가 되어도 전시회나 극장을 다니면서 다양한 작품을 접하고 좋아하는 작가를 늘릴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에 쏙 드는 예술작품을 만났을 때의 기쁨!
전시회나 극장에 다닐 기력이 남아있도록 지금부터 운동을 잘 해두어야겠다는 결론이 나온다.
글을 쓴다.
나이가 들면 글은 더욱 깊어진다. 그것이 글의 최대 장점.
나는 나이 들어가는 서러움과 불편함을 그대로 글로 옮길 수 있고, 늙어가는 사고도 기록할 수 있다.
늙어감에 따라 변하는 내 다양한 생각을 모두 기록해야지.
그래서 마지막으로 에세이 책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책을 같이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길 수도 있다.
내 미래를 상상하니 썩 나쁠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친구들도 잘 사귀고 귀엽게 늙을 예정이니까,
다양한 모임을 만들어 사람들과 어울리며 바쁘게 지낼 것 같다.
아주 먼 미래를 상상하니까 지금을 반성하게 되고 다양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은 꾸준히 해야 할 것 같고, 스포츠도 하나쯤 배워두면 좋을 것 같다.
스쿠버 다이빙이나 테니스 같은 건 나이 들면 못 하니까 꼭 젊을 때 배워두자.
그리고 음악과 미술 분야도 배워두면 나중에 잠 안 오는 밤에 어떻게든 도움을 받을 것 같다.
매년 배워볼까 생각만 하던 기타인데, 올 해는 한번 도전해볼까.
사진도 배우고, 영어도 배우고, 다양한 나라도 가보고, 요리에도 도전해 보고, 바닷가에서도 살아봐야지...
죽기 직전의 나를 상상하다 보니 지금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지는 아이러니.
어떤 사람은 3년에 하나씩 전혀 다른 분야를 배우면서 살았다고 한다.
모두 한꺼번에 하려면 마음만 바빠지고 포기하기 쉬우니까
제일 하고 싶은 걸 골라서 한 번에 하나씩, 그렇게 지금을 채워나가기로 한다.
왠지 몇 달 후의 여행 비행기를 예매해 놓고, 그 날만 기다리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된 것 같네.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었나.
새삼 살아있다는 것이 즐겁고, 앞으로도 이런 기분으로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솟는다.
일단 새해 출발로는 좋은 마음가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