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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May 10. 2017

소개팅 전에


여기엔 솔직하기로 했으니까.



대학교 친구가 소개팅을 하겠냐고 물었다. 

나는 요새 어떤 다부진 육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애인이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일상의 치열함 속에서도 솔로인 나를 떠올려준 친구의 마음이 고마워서

그래 하겠다고 했다. 


바로 상대방의 조건이 줄줄이 날아왔다.

나이는 나보다 네 살이 많고 키는 평균보다 작았으며 외모는 나쁘지 않다고 한다.

바이크 가게를 운영 중이고 순박하고 성실한 성격이라면서 아버지가 땅부자라는 설명이 붙었다. 

그리고는 친구가 망설이면서 학벌을 중요하게 따지는지 물었다. 


이렇게나 많은 '스펙'을 알게 됐지만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갈팡질팡 했다.

이 조건만으로 도대체 뭘 알 수 있을까.

차라리 내가 헤어드라이기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용도나 필요에 따라서 까다롭게 조건을 고를 수 있겠다.

그런데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 필요한지 모르고, 저 조건만으론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학벌?

중요하지 않다고는 못 하겠다. 

이전에 대학교를 중퇴했던 남자를 만나던 때, 

나는 좀 주눅이 들어 있었고, 남자는 가끔 자격지심을 드러내던 걸 떠올려보면

학벌이라는 건 단순히 학벌에서 그치지 않는다.

모든 건 그 사람의 성격 형성에 관여하고 있으니까,

괜히 학벌 따위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척했다가는 많은 책임을 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 일이란 건 모르는 거니까, 그리고 내 친구가 괜한 사람을 소개해 줄 것 같지도 않으니까

학벌이 어쨌든 괜찮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어쩐지 좀 비상하고, 생각이 많아서 자기 세계도 있고, 문화예술도 즐길 줄 알면서

내가 끝까지 침범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있는 흥미로운 사람이면 더 좋을 것 같은데,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 이번에는 친구가 더 민망해하면서 연락을 해왔다.

어디 전문대를 나왔겠거니 했는데 남자가 고졸이란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었다. 

친구는 거절해도 되니까 편하게 말해 달라고 했다. 

여기서부터 나는 복잡하게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나와, 그래도 어울리는 부류가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무려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부르짖는 대선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사실 처음에 '오토바이 가게'에서부터 느꼈던 찜찜함이었다. 

그 이미지에서 풍겨오는 어쩔 수 없는 역마살 기질과 거칠고 쾌락적인 느낌, 

그 와는 정반대로 '가게'라는 공간 안에 잡혀 있는 어떤 답답함 같은.

근데 거기다 사람은 성실하고 순박하다고 하니,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감이 안 잡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추가. 그 사람은 고졸이었다. 

어떡하지.



나, 

어쭙잖게 운이 좋아서 좋은 대학을 나왔다.

그런데 너무나 운 좋게 들어왔다는 생각에 스스로 이 대학의 일원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소위 명문대생들 앞에서는 불편함을 느꼈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 앞에서는 흥미를 못 느꼈다. 

언제나 중간에 낀 사람으로 어디에도 속하지는 못하지만

여기저기 떠돌면서 양편을 두루 이해하게 된, 그 정도의 부류.

그리고 나 스스로 이상한 학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어서인지 타인의 학벌에 크게 무게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친구가 추가한 조건을 듣고 나서, 내가 학벌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의미는

어떤 대학이냐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지 대학 자체를 무시할 수준은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엄청 고민이 되었다. 

고졸이라서 거절하는,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은데

한편으로는 그 사람과 만나봤자 통하지 않을 거라는 강렬한 직감이 몰려왔다. 

서로의 콤플렉스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소개팅은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그래도, 혹시나 모를 인생의 반전 같은 것들이 나를 유혹했다.

이 조건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그 사람만의 특별함 같은 것들이 있을 거라고,

내가 인생의 틈에 숨겨진 보석 같은 것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심리.

그랬더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소개팅 한번 했다고 결혼할 것도 아니고, 내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을 수도 있는데 뭘 이렇게 고민하나.

잘 하면 평소에 타보고 싶었던 부아아아아앙- 하는 오토바이 한 번 탈 수도 있겠다,

그런 단순한 생각으로, 친구에게 소개팅을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상대방이 내 학벌이 부담스럽다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허탈한 웃음 뒤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몰려온다.

내 나이가 한 살씩 많아지고, 내 직업이 결정되고, 

하여튼 내가 나로서 뭔가 자리를 잡아 갈수록

내가 만날 수 있는 남자의 범위가 뭉텅이로 깎아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를 거절한 그 사람이 나보다 더 현명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처럼 쓸데없이 예측 불가능한 가능성에 모험을 걸기보다는

이제껏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어차피 안 될 것에 대한 기대는 일찌감치 접어버리는 노련함이 있으니까.



피식 웃고 말려고 했는데, 생각할수록 허탈하다.

내가 뭐라고 사람을 그렇게 재고 따졌나 하는 점에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겠다는 욕심이 커지면

나는 도대체 나에게 어떤 사람까지도 만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무서워지기도 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만큼

나를 끝없이 망치는 위험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도 큰 걸 보면

나는 아직 덜 늙었다. 경험치도 노련미도 부족하다.



아무튼, 나와 얼굴 한 번 볼 뻔했던 그 사람,

나보다 성숙하고 현명하고 솔직한 그 사람, 

잘 지내라고 여기다 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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