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루카!
'잘루카'라니, 역시나 외국인이구만.
"쟤 이름 뭐야?" 나는 분을 못 이겨 씩씩거리며 아이들을 다그쳤다. 학교가 끝나 너 다섯 명의 아이들이 무리 지어 집에 돌아가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잘루카 그 아이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나는 몇 학년 몇 반 인지도 캐물어 알아냈다. 항상 조용하던 골목에 웬 소란인가 하며 나와보는 어른이 슬쩍 보였다. 왠지 내편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에 잘못한 거 없이도 무척 신경이 쓰였다. 다섯 살 세 살 난 내 아이들은 길 건너 멀찍이 그저 서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 하고는 킥킥대던 남자아이들을 쫓아 냅다 뒤돌아 뛰어가는 엄마를 보고 적지 않게 당황했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던 길이었다. 그 날은 오후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오전 수업이 끝난 아이들을 데려와 집에서 점심을 먹이고 2시경에 다시 유치원에 데려다주어야 했다. 하필이면 그게 초등학교 하교 시간과 겹치는지, 그때마다 같은 골목 어귀에서 같은 얼굴들을 만나곤 했다.
'싱!솅!셩!'
고 세 놈이 내 뒤통수에다 대고 외친 말이다. 물론 키득거리는 소리도 빠질 수 없었다. 싱솅셩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놀림감이 되고 있다는 건 대번에 알아차렸다. 두 아이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순간적으로 나는, 내 아이들이 불쌍해 죽겠고, 나는 기막혀 죽겠고, 저 놈들은 괘씸해 죽겠다는 억하심정에 어지러웠다. 한 3초 정도 고민했던 것 같다. 그냥 지나칠까, 그냥 지나칠까,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고, 내가 뒤를 돌아보니 그 놈들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 놈들이 도망치니 나는 잡으러 쫓아가기 시작했다. 뭐라도 반응을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지켜보는데 바보처럼 그냥 있을 수는 없다는 떠밀림 때문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떻게 해야 했는지 그때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 아이들은 잽싸게 뛰어가 버렸고 나는 뒤에 남겨져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 날이 처음이었다. 싱솅셩을 듣게 된 것이. 그리고 그 날은 알지 못했다. 내가, 또 우리 애들이 앞으로도 계속 수 없이 많은 싱솅셩을 듣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이 '싱솅셩'의 연단은 우리 아이들이 학교 들어가기 일 년 전 무렵부터 시작하여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다행인 것은 이 연단의 시기가 거의 끝나간다는 예감이 든다는 것이다. 신기한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장난꾸러기들이 다행히도 초등학교 3, 4학년에 몰려있고, 앞으로는 나도 그 또래 아이들을 마주칠 일이 별로 없을 테니 말이다. 시간이 공평하게도 흘러가니 우리 아이들도 자라고 그 장난꾸러기들도 자란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사실, 아이들 장난이라지만 나에게는 매번 마음을 멍들게 하는 돌덩이였다. 처음에는, 열등감 가득한 외국인 가정에서 막 자란 못 배워먹은 비행 아이들이 그러는 줄 알았다. 그래서 당당하게 그 애들 다니는 학교로 찾아가 항의도 하고, 길목을 지키고 나만 나타나길 기다리던 잘루카 엄마와도 길바닥 싸움을 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용감해진다고 싱솅셩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기다란 골목 끝에서부터 고만 고만한 남자아이들이 무리 지어 오면 내 뒷골이 빠직빠직 당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가 동양인이라고 아이들까지 우습게 보는구나'하는 생각에 다다르면, 불타오르는 전의가 푹 꺼지면서 헤어 나오기 힘든 우울의 늪으로 직행하곤 했다.
그러다 한번, 나에게는 구원이 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싱솅셩을 뒤통수로 들었다. 내 손엔 두 아이 손이 쥐어져 있었다. 학교 울타리 넘어 혼자 노는 남자 아이가 보였다.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냥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울타리를 마주 보고 그 아이에게 다가가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혀 튀어나온 말이, '너 이름이 뭐야?'였다. 말하면서도 내가 우스웠는데, 곧이어 대답이 왔다. '루카스예요.'
속으로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 '루카스예요'라니. 기대하지 않았던 솔직한 통성명에 그제야 그 아이들이 제 나이에 맞는 어린이로 보였다. 전에는 내 아이보다 큰 아이들은 모조리 그냥 '큰 애'였다. 작은 내 아이가 큰 애한테 괴롭힘 받는다고 생각했고, 자기 잘못을 알고도 장난치는 큰 애는 제 이름을 적에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루카스예요'라니...... '루카스, 다음부터는 싱솅셩하지말고 그냥 할로라고 해'라는 말이 미끄러지듯 내 입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날은 너무 기뻤다.
그렇게 나는 가까스로 독일 땅에서 어른이 되었다. 독일어를 그 아이들보다 못해도 나는 어른이 될 수 있었다.
참, 추가로 덧붙이자면, '싱솅셩'은 '가위바위보'로 쓰이는 말이다. 요즘 애들이 원래 있던 '슈닉슈낙슈눅'을 놔두고 싱솅셩으로 바꾸어 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우리 아이들도 '싱솅셩'하고 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