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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혜송 Jul 30. 2024

2010년의 작업노트 2

보물창고 오픈(2)









- 5월 22일     


  처음 먹을 찍었다. 점을 찍어 그리는 데 너무 연해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소나무를 그리다 2번이나 먹이 튀었다. 제대로, 맑은 정신으로 그림에 임해야겠다. 12시까지 그리다가 그림에 실수를 할 것 같아 들어가서 자고, 일찍 나오기로 마음먹었다. 소나무의 선은 왜 구불구불한 것일까? 왜 직선이 없을까? 생각을 했다. 연한 먹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마음에 연한 먹으로 시작했다. 너무 연한 것 같아 조심스럽기도 했지만, 일단 한 번 해 보자는 마음이다.


        



- 5월 23일     


  다음날 발표가 있어 많이 그리지 못했다. 그림 속 사람들의 행동이 말하는 게 과연 무엇일까? 집의 크기와 나무의 크기가 비정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이 얘기하는 건 무엇일까? 동그란 것과 네모난 것의 대비. 조춘도가 말하는 것은 지옥과 천당인가? 왜 곡선밖에 없을까? 그림에 직선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 5월 24일

    

   전날 새벽 2시까지 그리고 3시에 잠든 후, 8시 전에 실기실에 도착했다. 아침에 부드러운 왼쪽의 돌 부분, 오전에 집, 중간의 숲, 윗부분을 그렸다. 빨리 해야겠다는 마음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의 양심에 손을 얹었을 때 얼마나 그림에 진지하게 임했고, 자신에게 얼마나 정직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도가 나가지 않음을 알지만 연한 먹으로 계속 우려냈다. 물론 이보다 더 빨리 열심히 해야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한 순간의 감정으로 그림을 망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 5월 29일     


  8시 전에 먹을 다 갈고 그림을 보니.. 이때까지 너무 조심스러웠던 탓일까? 전체적으로 너무 연하다. 산 부분의 나무처리는 아예 되지 않았고, 밑도 하얗게 그려져 있지 않았다. 집은 대충 위치만 잡아 놓았기 때문에, 기와와 집의 형태를 다잡아 제2 맥을 그려 넣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연하게 몇 번 올렸으니, 제1 중심맥에 진하게 들어가기로 했다. 소나무 기둥을 다 그리지 못했는데도 꼼꼼히 하다 보니 3시간이 걸렸다. 진한 먹으로 하니 겁이 나기도 했다. 중심을 세우고 나니, 그리기 전 보다 주변부가 흐려 보였다. 이제 중심을 맞췄으니 주변을 맞춰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먹을 들어갈 때처럼 먹이 진해지되, 실수는 절대 없어야 하고 맑은 정신으로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꼼꼼히 점을 찍어서 나무 기둥과 나뭇잎을 그리니 시간이 걸리지만 완성도는 있었다. 진한 먹으로 그리니 그림이 확 사는 것만 같아, 주변부를 맞춰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실수를 했다.


     




2024년의 나 :????? 무슨 개똥 같은 소리지?










- 5월 30일     


  윗부분이 진해 보이길래, 그냥 진한 먹을 찍어 그렸다. 제1 중심 맥을 진하게 잡고 주변을 맞춰 갔던 것처럼 윗부분도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진한 부분이라도 원/근경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먹이 연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완성에 급급했기에 실수를 했다. 후회했다. 이 사태를 어쩌면 좋을지. 갑갑했다. 주변을 그렸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에 어쩔 수 없다. 밑 부분을 더 진하게 그리고 한 톤씩 더 어둡게 하려고 했지만, 밑의 제1 맥의 활엽수와 소나무 기둥에 연한 먹을 너무 많이 올려서인지 아니면 더 이상 진해 질 수 없는 짙은 먹색을 칠해서인지 가능하지 않았다.


그림은 역시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5월 31일     


  그림 검사가 있는 날이다. 일단 그리지 않은 곳이 너무 많았고 진한 먹으로 그려버린 맨 윗부분이 그림 속에 조화롭게 자리 잡도록 만들기 위해 주변을 그렸다. 전체적으로 그리지 않은 곳이 없이 그렸고, 아래 물가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가족과 일을 하는 두 사람을 그렸다. 왼쪽의 가족에게서 거처를 볼 수 있었고 오른쪽의 어두운 부분과 두 사람이 일하고 있는 부분과 이어지는 길이 있었기 때문에 그림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안쪽에 이 사람들이 갈 곳이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평가 후, 배접을 한 후의 그림 색을 생각해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패닉이 왔다. 먹이 마르기 전과 후를 구분해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씀에는, 나름대로 구분을 위해 손에 그어 보거나 물기를 빼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 부분에 선을 그어 먹색을 확인하고 그림을 그렸던 것이 생각났다. 옳은 지 모르겠지만 마르기 전, 후의 먹색은 먹에 100(진)부터 1(연)까지의 단계가 있다고 하면 나는 100부터 80까지는 구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과연 맞는지는 모르겠다.     


   한 접시만 사용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작은 붓이라도 아교를 골고루 섞거나, 붓의 털을 정리하기 위한 물감접시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여러 그릇을 쓰다 보니 같은 양의 먹물이라도 다른 그릇에 담겨 있기 때문에 물의 깊이에 따른 색이 달라 보였다. 그래서 매우 연한데도 목이 깊은 그릇에 있으면 진해 보이기도 하고 꽤 진한데도 목이 옅은 접시에 있으면 연해 보였다. 접시를 통일해서 구분을 한다면, 익숙해진 후 시간을 아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과연 옳은 지는 잘 모르겠다.



계속 그림을 그려 봐야 알 것 같다.          

















이렇게 작업노트를 남겨준 그 시절의 나에게 감사를 보낸다. 꾸벅. 원래 8시에 자고 3-4시에 일어나지만, 과거의 작업노트 덕분에 용기를 갖고 2024년에 야작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야작 하다 열두 시 땡! 한 김에 글을 올리고 자러 간다.


내일의 내 작업도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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