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을 하려면 식당을 구해야 한다. 출강으로 여기저기 다니며 무엇을 가르친다면 어쩔 수 없이 그 공간에서 가능한 부분을 선택하게 된다. 직장인들도 재택근무의 한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지금 집에서 가능한 작업들은 다 했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지 약 3개월이 되었고 많은 부분이 진전되었다. 이 시점에서 고민되는 것은, 모두 완성할 때 까지 과연 내가 아이들에게서 내 그림을 지킬 수 있는가다.
하원 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위해 허겁지겁 그림을 숨겨야만 하고, 혹시나 내가 모르는 사이 그림이 있는 방에 들어가지는 않을까 불안함을 느낀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라 충분히 엄마 그림을 고쳐주고(?)싶은 욕구가 있고, 또 과감한 실행력도 가진 아이들이기에 불안에서 탈출할 수가 없다. 스케치를 할 때는 낙서를 하더라도 가능한 범위이기에 수습할 수 있었는데 본 작업에 들어가보니 아이들 손이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다.
어차피 이사가기로 한 것. 집을 줄이기로 했고 내 그림은 주로 대작이니, 이사 가는 집에선 작업을 할 수 없다. 이 모든 상황이 말해준다. "작업실을 구해야 한다"고. 작가는, 작업실이지. 2주 정도 아이들과 쉼터에 입소하면서 불가피하게 그림과 떨어져야만 하는 상황이 있었는데 이건 뭐.. 분리불안이 왔다. 작업은 커녕, 그림을 잠시 보러 올 수 조차 없었는데 미칠 것 같았다.
어차피 작업은 끊김 없이 이어나가야 한다. OK. 작업실 구하자. 내 작업 중, 소품은 30호다. 큰 작업은 100호 화판이 작게 느껴져 집의 천정부터 끝까지 종이를 붙인 비규격 사이즈이다. 어차피 작업할 거. 이사 후 작업실을 새로 구하고, 짐을 또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과 불필요한 시간 따위 없애버리자. 조건은 월 부담이 적고, 25평 이상. 그리고 아이들이 다니는 기관과 가까울 것!
대강의 가격과 사이즈가 나왔고 가닥이 잡혔다. 자금을 조달하고 입주 청소를 해야 한다. 그리고 월세 이상으로 경제적인 여유를 획득해야 한다. 나는 매일 아침과 저녁, 주말 종일은 아이들과 함께해야 하고 평일 중 하루는 꼬박 서예에 몰두해야 한다. 나는 설계 연구직으로 일을 했었는데 그 업종은 근무시간이 12시간이 넘으며 내가 없으면 일이 올스탑된다. 그러면 아이들이 아플 때 어떻게 해야 해?
그림은 내가 못 하면 죽을 것 같고, 힘들어도 끝장을 보고 싶은 거라 하는 거면서 벌이가 안된다고 징징댈 수는 없다. 그러면, 대책은. 많은 작가 선생님들께서 미술학원 강사로 일하셨다고 했다. 수업을 하기로 했다. 다른 작가들은 안정적인 수입과 지원이 있어 작가가 되었을까? 글쎄, 중요하지 않다. 각자의 상황이 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작업실을 구해 작업을 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졌고, 지금도 하고 있다.
집에서 작업을 하면, 작업과 가사의 ON/OFF가 어렵다. 그리다 보면 집안일이 밟힌다. 집이라 편하게 붓만 들면 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아무래도 힘들 때 드러눕게 되기도 한다. 아니, 난 더 제대로 하고 싶어. 매번 카메라 각도를 바꿔야 하는 시간조차 아껴서 그림에 몰두하고 싶다. 큰 공간에 여러 가지의 작업을 맘껏 벌려놓고 마구 칠하면서 신나게 그리고 싶다. 지금은 여러모로 불가능하다.
이곳은 작업실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거주하는 집이니까.
집에서 처음 그림을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정말로 작업실을 구하면 안 될 정도로 많은 것들을 진전시켰다.
12월부터 경제적 지원 없이 3, 4살 육아만 해도 쉽지 않은데
4월 사건 이후 육아, 소송, 자립준비, 병원, 운동 등등..
해야 할 것들을 다 해내면서 핑계대지 않고
이만큼 해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
고민 끝에 나는 28평짜리 아주 마음에 드는 작업실을 계약했다.
이미 많은 것들이 정리되었고, 일과 가사의 분리가 이루어지면
나와 아이들의 삶은 분명 더 더욱 좋아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