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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수 Oct 18. 2021

다음에 오면

2월에 제주도는 동백꽃이 다 떨어질 만큼 추웠다. 나는 혹시나 해서 챙겨간 스키복을 여행 내내 입고 다녔다. 제주도 여행길에는 부모님 외에 할아버지 할머니도 함께 동행했는데, 너무 오랜만에 여행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밝아 보이는 두 분의 표정에 뿌듯한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평소보다 밝아 보였다는 그 두 얼굴의 이면에는 비교적 어두운 평소의 날들이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80년 가까이 내공에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몇몇 사건들을 또렷이 기억한다. 할머니가 40년을 정성으로 키운 화초를 도난 맞은 날, 할머니의 무릎을 수술하던 날, 뜻밖에 모두를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날, 그리고 숙모가 울던 날. 그 불친절한 날들이 겹겹이 쌓여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에 그늘이 되어 앉았다. 


나는 두 분의 사랑을 먹고 자란 아이로서, 그리고 나에게 따뜻한 어린 시절을 선사해 준 보답으로서 그 어두움을 밝혀보려 부단히 도 애를 썼다. 어르신들 사이에서 자랑거리가 될까 싶어 '기쁜 소식'이나 '잘난 소식'을 만들어 오기도 하고, 밝은 에너지가 도움이 될까 싶어 조잘조잘 두 분 앞에서는 한껏 수다쟁이가 돼보기도 했다. 그런 나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말없이 소파에 앉아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할머니는 한숨으로 하루를 채우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그늘진 할아버지 할머니의 일상에 제주도 여행이 조금이나마 기분전환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추운 날씨였고, 훨씬 강한 바람이었고, 꽃은 대부분 지고 없었다. 초록색 풀로만 가득 찬 길을 지나는데 할아버지가 조용히 창문을 내리며 말했다. "참 푸르다." 할아버지는 창문을 연 채로 그 푸른 길을 한참을 보았다. 할아버지의 눈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좋은 풍경이나 좋은 음식을 먹을 때면 할머니는 언제부턴가 꼭 '우리 나이에는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라는 말을 붙여서 엄마에게 핀잔을 듣곤 했는데,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는 그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여행하는 3일 내내 뒷자리에 탄 할머니는 '다음에 오면 옥돔구이 먹으러 가자'라든지, '다음에 오면 동문시장도 들르자'라는 등 마지막이 아닌 다음에 대해 끊임없이 말했다. '다음에 오면', 그 말이 너무 좋아서 할머니의 밝은 목소리를 배경 삼아 한참을 마음에 담고 또 담았다. 다음이 오던 안 오던 할아버지 할머니 눈은 계속 빛이 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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