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쯤부터 아이가 옷에 대한 거부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고집이 좀 센 아이 정도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옷에 대한 아이의 떼와 거부감은 심해졌다. 옷을 입어야 외출을 하든 놀이터에 가든 할 텐데 옷 입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 외출은 호사에 가까웠다. 기관에 다니게 되면서 아이의 옷에 대한 거부와 짜증은 훨씬 심해졌는데 어느 정도냐면 아침마다 짜증 내는 아이의 모습이 두려워서 심장이 벌렁거린 채 잠에서 깰 정도였다.
가족끼리 외출을 하는 날에도 기분 좋게 외출을 준비하다가 결국은 옷을 입으면 아프다고 잡아 뜯는 바람에 현관문도 열어보지 못한 날도 부지기수였고 그때마다 우리 부부는 서로의 부족한 인내심을 탓하며 싸움으로 하루를 보냈다. 옷만 입으면 아프다고 하는 이 병이 마치 의대증을 연상시킬 정도라 이 병(?)을 고치지 않고서는 아이도, 나도, 가족 모두가 환자 아닌 환자가 될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이 좋아하는 옷 하나는 그래도 울면서도 참고 입어주는 지라 나는 아이가 잠들면 밤마다 아이의 단 하나밖에 없는 옷을 빨아 드라이로 말리는 게 일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이의 증세는 점점 더 심해졌고, 내 마음 역시 쪼그라들어가고 있었다.
가끔 아이가 옷을 거부하며 짜증 내는 모습을 보게 된 사람들은 내 눈치를 보며 자연스럽게 말이 없어지거나, 내 동의 없이 저 못된 버릇을 고쳐 보겠다고 아이를 혼내기도 했다. 엄마가 돼서 애 하나도 잡지 못한다는 잔소리와 함께. 그럴 때마다 나는 죄인처럼 숨어들고 싶다가도 이런 상황을 늘 만드는 아이가 너무 미웠다. 화를 견디지 못해 아이에게 화라도 내면 남편은 나를 자기 자식 하나도 감싸주지 못하는 나쁜 엄마로 몰아버리고 나가버렸다. 주변 사람이든 남편이든 그저 안타까운 마음이 컸겠지만 주변의 시선들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고 그럴수록 나는 아이의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을 꼭 치유해주리라 다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아서.
여러 가지 방법을 알아봤다. 아이의 심리를 다루며 치료를 하는 방식들은 매우 다양했는데 소아정신과를 권하는 사람도 있었고, 놀이치료나 음악치료와 같은 방법을 권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후배가 괜찮은 상담가를 알고 있다며 한번 상담을 받아보라고 상담가의 번호를 줬다. 지역 사회에서 오랫동안 아이들의 심리 상담을 전문으로 하시는 분인데 많은 임상 경험을 가지고 있으신 분이니 신뢰할 만하다는 말에 나는 기대감으로 전화를 했다. 사실 이미 여러 군데에서 상담을 받았는데 공통적으로 지적된 말은 바로 ‘불안’이었다. 아이의 불안감이 옷이라는 특정한 물건에 투사되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나는 아이를 괴롭히는 그 불안을 떨쳐주고 싶었다. 그리고 기왕이면 오랜 경험을 지닌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싶었던 차에 잘 됐다 싶었다.
나는 상담가를 찾아가 삼 년 동안 지속된 아이의 문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아이에 대한 문답이 끝나고 나서 이어 부모에 대한 문답이 이루어졌다. 모든 문제에는 환경의 영향이 절대적이니 부모에 대한 접근은 반드시 필요하다. 부모의 육아 방식이 아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일 테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아이에게 접근하는 것 역시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상담가의 질문이 계속되면서 참을 수 없는 불편함과 불쾌함이 올라왔다. 상담가의 질문은 부모가 아닌 오로지 엄마인 나에게 집중되었다. "평소 아이와 관계는 좋은가요? 훈육은 어떻게 하나요? 아빠와의 관계는 좋은가요? 모유 수유를 했나요? 아님 분유를 먹였나요? 태교는 어떻게 했나요? 임신 기간 동안 특별한 일이 있었나요?"
왠지 구석으로 몰아가는듯한 질문에 의아했고 또 지쳤다.
“나는 모유 수유나 태교가 지금 아이의 상태와 관련이 있나요? 왜 이런 질문이 필요한가요?”라고 물었다. 상담가는,
“아이의 문제는 엄마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니까요.”
“그럼 아이의 상태에 아빠의 영향은 없는 건가요?”
“아빠는 육아에 큰 영향력을 가지지 않습니다. 엄마가 아이의 거의 모든 것을 좌우합니다.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덴 다 이유가 있지요.”
나는 더 이상 상담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 아이는 나 혼자 낳은 것도, 나 혼자 키우는 것도 아닌데 모든 문제는 엄마에게서 비롯되었다니. 나의 나쁜 행동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결론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 태교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태교를 잘못하면 나쁜 아이가 태어난다고 증명할 수 있을까? 또 하나 태교를 잘못했다는 근거를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클래식을 들으며 좋은 음식을 먹는 게 좋은 태교인가? 징그러운 닭발을 먹고, 시끄러운 소음을 듣고, 싫은 사람을 미워하면 나쁜 태교인가?
아이를 품고 있는 예비엄마들은 매운 음식을 먹고 싶어도 혹시나 아이의 피부가 나빠질까 봐 참는다. 커피를 먹고 싶지만 혹시나 아이의 뇌에 영향을 끼칠까 봐 참는다. 오랜만에 공포영화를 보고 싶어도 혹시나 배속의 아이가 놀랠까 봐 보지 않는다. 하라는 것보다 하지 말라는 것들이 훨씬 많지만 참는다. 그렇게 지킨다고 해도 문제가 생기면 왠지 죄책감이 들고 눈치가 보인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들은 안 했는데도 아이는 아토피를 달고 살고, 툭하면 감기에 걸린다. 밥도 잘 먹지 않아 비쩍 마른다. 그러면 옆에 있던 어른들은 안타까움 마음으로 “엄마가 배 속에 있을 때 신경을 좀 썼으면 건강했을 텐데.”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말한다. 그 지나가는 말은 엄마에게는 비수가 되어 꽂힌다. 정말로 아이의 마음과 몸은 오로지 엄마 노력의 결과물일까? 엄마는 언제까지 아이의 책임자라는 딱지를 달고 살아야 할까?
다른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아이의 기질이나 예민함이 엄마의 부족한 태교와 잘못된 육아 방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아이는 부부가 함께 낳고 함께 키워야 하는 것인데 사회는 이 것을 각각 '엄마 역할과' 아빠 역할'이라는 말로 구분 지어 버리고 아빠를 육아로부터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그리고 그 엄마가 그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당연시하도록 만든다. 이른바 독박 육아를 하게 만들어 놓고 아이에 대한 책임도 독박을 쓰게 만드는 것이다.
정확한 데이터를 들이밀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에서 육아의 70프로 이상은 엄마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심할 경우 아빠가 아예 육아에서 배제되는 경우도 많은데 육아에서 배제하는 또는 배제당하는 이유는 많다. 가장으로서 경제 활동에 전념해야 해서, 육아는 잘 몰라서, 안 배워서, 서툴러서, 아무리 노력해도 잘 늘지 않아서, 나보다 아내가 더 잘해서 등등. 처지에 따라 스스로는 육아로부터 배제하기도 하고 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의 통념에 의해 배제당하기도 한다. 물론 예전보다 아빠들의 육아 참여 비율이 높아지긴 했지만 막상 주변을 둘러보면 흔하지 않은 케이스라 대개 ‘참 좋은 아빠’이라는 부러운 시선을 받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그런 남편을 둔 아내들은 남편이 육아를 잘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무리 노력해도 늘지 않는 육아는 엄마나 아빠나 똑같다. 다만 엄마는 잘해봐야 본전이고 아빠는 잘하면 특급 칭찬을 받을 수 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나는 다행히 다른 좋은 상담 선생님을 찾았고 아이는 일 년 동안 놀이치료를 받기로 결정했다.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아빠만 따로 상담하는 시간을 가졌었는데 상담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길래 그러냐는 나의 질문에 상담가 선생님께서 지금 잘하고 계시니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하라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전문가에게 칭찬을 들은 남편은 스스로를 대견하다 느꼈는지 나에게 문제는 문제를 만드는 너라며 진담 같은 농담을 던진다. 고민하고 상담하러 백방으로 다닌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문제화 한 극성의 엄마가 된 느낌이다. 아이의 불안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반성하고 또 변화를 줄 것을 약속했던 남편은 전문가 한 마디에 “좋은 아빠”가 되었다. 사실 상담가 선생님의 날카로운 조언을 기대했던 나는 괜한 실망을 느끼기도 했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조금만 잘해도 칭찬받는 아빠 육아, 아무리 노력해도 다들 하는 건데 뭘 그러냐는 핀잔이나 극성 좀 그만 떨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엄마 육아는 언제쯤 수정될 수 있는 것인지 답답함이 밀려왔다.
결과적으로 아이는 이전보다 좋아졌다. 옷을 입을 때는 여전히 힘들긴 했지만 알아서 입기 위해 애썼고 또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다. 아이의 표정은 편안해졌고, 나 역시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적어도 그 선생님은 엄마의 역할을 탓하지도 않았고, 임신 기간의 불행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것만으로 나는 만족을 느끼기로 했다. 적어도 태교나 모유 수유와 관련된 죄책감은 느끼지 않아도 됐으니 말이다.
아이는 지금도, 앞으로도 자라고 언젠가는 또 나를 그때보다 더 힘들게 하겠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내 탓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의 문제는 엄마 탓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