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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심고, 아이가 캐고, 엄마가 만드는 봄의 보양국

겨울 끝자락인  2월 중순이 넘어가면 그동안 아끼고 아끼며 써왔던 에너지들이 밑바닥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런가 이쯤부터 본격적인 봄이 시작되는 3월 중순까지는 특별히 하는 것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쉽게 몸이 쳐지고 체력도 영 달린다. 쉽게 지치니 움직이지 않게 되고, 움직이지 않으니 한없이 둔해지기만 한다.  무기력증과 작은 우울증은 이런 몸을 귀신같이 알고 마치 단골손님처럼 찾아와 수시로 들락날락 거리며 안 그래도 없는 기운을 쏙쏙 빼가곤 한다.


그렇게 여러 날을 보내던 3월 초 어느 아침 날, 커피 한잔 들고 우두커니 마룻바닥에 앉는다. 문득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듯하게 느껴진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인데도 괜히 바깥공기가 궁금해진다. 둔한 몸을 일으켜 거실 창을 열고 바깥 냄새를 맡는다.


“어? 이상하네. 어제까지만 해도 마른 흙바람이 날렸는데....”


오늘따라 축축한 흙냄새가 진하게 난다. 밤 사이 비가 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순간 따뜻한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내 코와 피부를 살짝 치고 지나간다. 앗, 봄바람이다! 어제와 다른 공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밤 사이 봄이 왔구나! 아이가 일어나면 곧장 말해줘야겠다. 며칠 사이 내로 드시어 우리에게도 신나게 할 일이 생겼다고. 1년을 기다려온 음식을 드디어 먹게 생겼다고. 


봄이 되면 아이와 내가 가장 바쁘게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집 뒤 논두렁을 따라 걸어 다니며 냉이를 캐러 다니는 것이다. 이제 열 살이 된 아이는 자기 손으로 냉이를 캔 다섯 살 이후부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언제나 냉잇국을 꼽는다. 된장 두어 숟갈 푼 물에 냉이를 넣고 푹 끓인 냉잇국 하나만 있으면 별다른 반찬 없이도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는 건 일도 아니다. 맛있다며 질겅질겅 냉이를 씹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다.   

다른 아이들이 그렇듯이 우리 아이 역시 처음부터 냉이를 좋아한 건 아니다. 사실 아이들 사이에서 냉잇국은 솔직히 좋아하는 음식은커녕 싫어하는 음식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고, 아예 냉잇국이란 음식을 모르는 아이들도 의외로 많다. 냉이뿐 아니라 나물을 재료로 하는 대부분의 음식들은 어른이라 해도 호불호도 분명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싫어하는 겨우도 많은데 하물며 아이들은 오죽할까 싶다. 그러나 나물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주 오래 옛날부터 봄철 기운을 책임지며 우리네 밥상을 소박하고도 묵묵하게 채워주었는데 세상이 변하고 먹거리가 풍요로워졌다고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 요즘 사람들에게 여간 서운한 일이 아닐 테다. 

 나물. 특유의 질감, 향, 맛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식재료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나무껍질을 씹는 듯한 거친 질긴 식감,  약 먹는 기분을 들게 하는 쌉싸름한 향, 무슨 맛인지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맛은 나물의 장점이자 가장 큰 단점이다.  냉이의 경우 다른 나물과 비교해봤을 때 생긴 것도 그닥 예쁘지도 않고 향도 강한 편이라 낯선 음식에 대한 두려움이 강한 아이들에게는 도전하기 어려운 식재료 중에 하나다. 마치 영화 <캐리비안 해적>에 나오는 괴물 ‘크라켓’을 연상케 하는 삐죽삐죽하게 사방으로 뻗은 여러 개의 줄기와 잎만으로도 충분히 비호감인데 하얀 뿌리까지 모두 씹어 먹는 나물이 말이라도 할라치면 아예 먹는 것 자체를 포기하는 아이들을 많이 봐 왔다. 게다가 이런 걸 먹어줘야 키도 크고 건강해진다는 엄마의 "협박"이 아이들로 하여금 냉이를 더 싫어하게 만든다. 단지 생김새와 향 때문에 사랑을 못 받는 것도 서운한데  협박까지 더해지니 냉이는 괜히 억울할 뿐이다. 우리 아이의 경우 냉이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바로 아이가 자기 손으로 직접 캐어 먹는, 그래서 노동의 대가가 무엇인지 담겨 있는 의미 있는 식재료였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냉이는 논두렁에서 자란 노지 냉이다. 겨울 내내 땅 속에서 추위를 버티고 있다가 싹을 내민 냉이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눈에 띄지 않아 지나치기 쉽다. 게다가 봄에 나는 나물은 대개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잘 모르면 냉이인지 아닌지 잘 구분도 안 된다. 그런데 확실하게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향을 맡아보는 것이다. 지금이야 눈으로  보기만 해도 바로 알 수 있는 냉이지만, 처음에 아이는 냉이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 땅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궁댕이’를 쳐들고 냄새를 맡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 마치 청둥오리들이 부리를  처박고, 엉덩이를 쭉 빼고 있는 먹이를 찾는 모습 같아 웃음이 절로 난다. 오로지 냉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세상 진지한 아이의 모습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하고도 이제는 볼 날이 몇 번 남지 않는 기억이기도 하다. 

어떤 냉이를 캐야 하는 아이의 질문에 너무 작은 것도 안 되고 너무 큰 것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 해도 어떤 걸 캐야 할지 도대체 모르겠단 질문에 딱 너의 손바닥만 한 크기면 가장 좋다고 말해준다. 그것보다 작으면 아직 더 자라게 두어야만 나중에 또 먹을 수 있다고, 만약 욕심을 부려 작은 것까지 다 캐고 나면 나중에 먹고 싶어도 먹을 것이 없을 거라고 말하면 아이는 쉽게 알아듣는다. 우리가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는 이상 자연은 늘 무엇이든 주게 마련이다. 그러니 기를 쓰고 욕심을 부려 냉이를 캘 이유도, 먹지도 않을 거면서 우선 쟁여 놓고 보는 자본주의적 수고도 필요 없다. 


냉이의 뿌리까지 온전히 캐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웬만한 비바람 정도에는 끄덕 없이 버티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줄기와 뿌리는 땅바닥에 착! 붙어 있다. 이 모진 겨울도 버텨낸 나인데 절대 너 따위한테는 안 뽑힐 거라는 고집인가 보다. 냉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야무지게 냉이 뿌리까지 쏘옥 하고 뽑아 올린다.  그렇게 한 끼를 먹을 만큼의 냉이를 캐면 우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얼마 안 캔 것 같아도 싱크대에 부어보면 꽉 찬다. 냉이를 깨끗이 씻는 동안 한쪽에선 물이 끓는다. 거기에 된장 두어 숟가락을 넣고 보글보글 끓으면 씻은 냉이를 넣는다. 마늘과 파를 넣어도 맛있겠지만 사실 된장만 넣고 끓여도 충분하다. 이것저것 넣어서 맛을 낸다고 유난 떨다 괜히 냉잇국 본래의 맛만 해친다. 냉이의 단맛과 쓴맛이 가장 훌륭한 양념이 되기 때문이다. 한소끔 끓고 나면 나는 한 숟갈 떠서 맛을 본다. 국물만 먹었을 뿐인데도 겨울 동안 맡아 보지 못한 푸른 향이 느껴진다. 곧바로 뿌리에서 우러나온 알싸한 맛과 달달한 맛이 따라온다. 손바닥만 한 풀에서 나오는 맛도 이처럼 여러 가지라니, 자연의 맛은 다 아는 맛 같아도 늘 새롭다.  

냉잇국엔 하얀 쌀밥이 제격이다. 쌀밥의 달달함이 냉잇국의 달달함을 더 해주기 때문이다. 짭짤한 김치나 깍두기 한 조각만 더 해지면  ‘단짠단짠’의 정수가 따로 없다. 고기반찬 안 부러운 한 끼 식사다. 그렇게 아이가 따온 냉이로 휴일 점심에 먹는 냉잇국은 가장 뿌듯한 한 끼다. 흰쌀밥에 소박한 냉잇국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서는 몇 시간이라는 수고가 따르지만 딸도 나도 전혀 귀찮지도, 싫지도 않다. 마트에 가면 깨끗이 씻어 진열된 냉이가 있지만, 비싸지도 않은 가격인지라 쉽게 사서 가볍게 끓여 먹을 수 있는 냉잇국이지만 딸아이가 직접 캐서 끓인 노지 냉이와 감히 비교할 수 있을까.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한국의 전통 음식에 대해서 설명을 해줄 기회가 있었는데 그중 나물을 설명할 때가 가장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나물을 영어로 해석하는 것도 쉽지 않고(샐러드라는 이름이 있지만 정확히 일치하진 않는다) 맛이나 식감 등을 설명하는 게 도대체가 정확하지 않아 영 아쉬웠다. 외국의 경우 채소를 식재료로 하는 음식의 경우 샐러드 개념이 보편화되어 있는 까닭에 채소를 삶아서 양념하는 것, 또는 물을 넣고 국처럼 끓이는 것, 아니면 말렸다가 두고두고 먹는 것 같은 문화를 생소해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음식을 왜 먹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더 많다. 마치 한국이란 나라가 아직 가난을 면치 못해서 이런 음식을 먹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어린 눈초리다. 그러나 나물만큼 가장 친자연적이고 친환경적인 음식이 있을까. 특히 사계절이 뚜렷한 덕분에 한국 음식은 계절별로 다양한 식재료를 얻을 수 있다는 혜택을 온전히 누리며 살고 있다는 걸 그네들이 안다면 논두렁 밭두렁에 흔하게 피어 나는 나물들이, 코를 박고 맡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나물들의 알싸하면서도 달큰한 향이 그저 그런 풀떼기 중 하나로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겨울 동안 앓았던 아이와 나의 무기력과 작은 우울은 냉잇국 한 그릇으로 치유된다. 냉이를 캐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논두렁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무거운 몸을 끌고 논두렁을 걸어가다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몸도 가벼워진다. 알 수 없는 풀과 꽃들이 땅을 뚫고 기를 쓰고 올라오는 모습을 보면 기특하기도 하고 그 힘이 마치 나에게도 전달되는 것 같아 웅크렸던 내 몸도 조금씩 펴지는 것 같다. 아이는 내 뒤에서 폴짝폴짝 뛴다. 기분이 좋아서 뛰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싹을 밟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뛰는 거란다. 그러다 지나가던 개미라도 밟으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앞서 가서 내가 놀려대면 아이는 그 자리서 걷지도 뛰지도 못하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징징거린다. 미안한 말이지만 엄마인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자연은 그 어쩌지 못하며 동동거리는 우리 마음을 기꺼워하며 지구를 지켰고, 우리를 지켰고, 우리의 몸을 지켜주었다. 사실 자연을 지켜주겠다는 의기양양한 약속은 지구에서 미약한 점조차 안 되는 내가 부리는 허세나 다름없지만 겨울을 버티고 땅을 뚫고 나온 새싹을 밟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개미를 밟지도 못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동동거리며 안타까워하는 아이의 마음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도록 꼭 도와주겠다고 약속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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